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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5) 수로왕릉과 허왕후릉

신비의 가락국 500년 역사
역사를 증언하는 왕과 왕후릉

  • 기사입력 : 2017-07-31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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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비의 베일에 가려져 있는 가락국 500년 역사 가운데 내용이 비교적 사실에 가깝고 거의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유적이 수로(首露)왕릉과 허(許)왕후릉이다. 수로왕은 서기 42년 가락국의 시조로 왕위에 올라 서기 162년까지 120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다.

    수로왕은 태자 거등(居登)에게 양위를 한 후 지품천 방장산(知品川 方丈山 : 지금의 산청군 금서면 지리산 자락)에 별궁을 짓고 허왕후와 함께 은거하다 38년 만인 서기 199년 15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수로왕은 우리나라 김해김씨의 시조가 된 분이다.

    그리고 허왕후는 가락 건국 7년째이던 서기 48년, 열여섯 살 때 인도 아유타국에서 배를 타고 수로왕에게 시집와 왕후가 되었으며 수로왕보다 10년 앞선 서기 189년 15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허왕후 역시 김해허씨의 시조가 됐다. 두 분 모두 150년을 넘게 산, 지금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연령이지만 이는 가락의 건국과정을 미화한 설화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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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제73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는 김해시 서상동의 수로왕릉.



    ▲가락국 입증 김해의 유일한 유적

    옛 가락국의 수도 김해에는 지금 500년 고도(古都)라고 이름을 붙이기가 어려울 정도로 남아 있는 유적이 별로 없다. 유일하게 남은 유적이라곤 김해시 서상동의 수로왕릉과 구산동의 허왕후릉 등이다. 이것도 왕릉으로 입증할 만한 자료가 없어 그저 추정만 할 뿐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는 ‘수로왕은 왕후가 세상을 떠난 후 매양 고침(孤枕)에 의지하여 비탄함이 많더니 10년을 지낸 헌제입안(獻帝立安) 4년 기묘(己卯) 3월 23일에 돌아가시니 수가 158세였다. 백성들이 마치 하늘을 잃은 듯 서러워하여 왕후의 돌아가시던 날보다 더하였다. 드디어 대궐의 동북 평지에 빈궁(殯宮 : 陵墓)을 지어 높이 1장(丈), 주위 300보로서 장사 지내니 수로왕묘(首露王廟)라 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수로왕릉은 김해시 서상동 312 김해 시가지 가운데에 있다. 1만8000여평의 능구역 중앙에 있는 봉분은 길이가 22m, 너비 21m, 높이 5m의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주변에는 특별한 시설이 없다.

    왕릉 정문 격인 숭화문(崇化門)에서 제2문인 홍전문(紅箭門)을 지나면 2층3칸으로 된 가락루(駕洛樓)를 마주하게 된다. 봉분 앞에는 능비(陵碑), 상석(床石), 장명등(長明燈), 망주(望柱)가 있고 경내에는 신위를 모신 숭선전(崇善殿)을 비롯하여 안향각(安香閣), 전사청(典祀廳), 제기고(祭器庫), 능침의 정문인 납릉정문(納陵正門), 숭재(崇齋), 동재(東齋), 서재(西齋), 신도비각(神道碑閣), 신도비(神道碑), 문무인석(文武人石), 마양호석(馬羊虎石) 등의 석조물과 건물들이 배치되어 있다. ‘가락국수로왕릉(駕洛國首露王陵)’이라 새긴 능앞의 비는 조선 인조 25년(1647)에 세운 것이다.

    ▲임진왜란·일제강점기 도굴 수난

    수로왕릉은 조선 선조 13년(1580) 당시 영남관찰사 허엽이 능을 수축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하는데 사적 제73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초기에는 능이 크게 황폐해져 있었다고 한다. 몇 차례 보수 정화작업을 거친 후 선조 13년(1580)에 영남관찰사 허수(許粹)가 왕릉을 수축하여 상석 석단 능표 등을 설치함으로써 비로소 왕릉다운 면모를 갖추게 되었으나 임진왜란과 일제강점기엔 일본인들에 의해 수차례 도굴을 당하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수로왕릉 뒤쪽은 넓적한 공원으로 조성해 시민들의 산책코스로 인기가 높다. 사계절 푸른 소나무와 대나무에서부터 우아하고 아름다운 거목까지 다양한 풍경을 만날 수 있다. 수로왕릉 주변길은 낮에는 유구한 역사가 빛나는 고즈늑한 길이라면 밤에는 야경이 빛나는 현대적인 길로 변신해 과거와 현재가 어우러진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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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지봉 건너편에 있는 허왕후릉. 오른쪽에는 허왕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수로왕에게 시집올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배에 싣고 온 파사석탑이 있다.



    ▲수로왕 158세, 허왕후 157세까지 살아

    한편 허왕후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후한영제(後漢靈帝) 중평(中平) 6년 기사(己巳) 3월 1일에 왕후가 돌아가시니 157세였다. 백성들은 마치 땅이 무너진 것과 같이 서러워하였다’라고 적고 있다.

    허왕후릉은 수로왕릉에서 북서쪽으로 1km 정도 떨어진 구지봉의 건너편인 김해시 구산동 산80-1에 있다. 능 모양은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이고 봉분 주변에는 아무런 시설도 없다. 봉분의 규모는 길이 18m, 너비 16m, 높이 약 5m이다. 능 주위에는 얕은 돌담을 방형(方形)으로 돌렸으며 능 앞에는 장대석(長大石)으로 축대를 쌓았고 중앙에는 상석(床石)과 능비(陵碑)가 세워져 있다.

    이끼가 돌처럼 굳어버리면서 노랑, 연두, 회색 등의 갖가지 색상을 빚어놓은 비석은 옛맛을 더한다. 뒷면에 빽빽이 새겨진 글씨는 이끼가 굳어져 좀처럼 알아볼 수가 없다. 도로 옆 능 입구에 있는 홍전문(紅箭門)과 정문 격인 구남문(龜南門)을 지나면 앞쪽 구릉에 허왕후릉이 보이고 오른쪽에 파사석탑(婆娑石塔)을 모신 파사각(婆娑閣)이 있다. 파사석탑은 허왕후가 인도 아유타국에서 수로왕에게 시집올 때 파도를 잠재우기 위해 배에 싣고 온 진풍탑(鎭風塔)이라고도 한다.

    사적 제74호로 지정된 허왕후릉 앞에는 ‘가락국수로왕비보주태후허씨릉(駕洛國首露王妃普州太后許氏陵)’이라 새겨진 능비가 있다. 허왕후릉은 평지에 있는 수로왕릉과는 달리 구릉에 위치하고 있으며 구산동고분군과 인접해 있다. 수로왕릉에 비하면 시설이 빈약한 편이며 왕후릉이란 확정은 없으나 수로왕릉과 함께 오래전부터 왕후릉이라고 전해져 오고 있다.

    허왕후릉도 수로왕릉과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것이 확실하다면 묘제(墓制)는 토광묘(土壙墓) 혹은 수혈식석곽묘(竪穴式石槨墓)일 가능성이 많다. 인접한 횡혈식석곽묘(橫穴式石槨墓)인 구산동고분군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허왕후릉 주변 또한 산책길로 유명하다. 허왕후릉에서 구지터널 위로 연결된 길을 따라 천천히 걷다 보면 길 양옆으로 심은 차나무가 반기고 병풍처럼 둘러 뻗은 소나무들이 잘 정돈된 조경과 함께 시원스레 펼쳐져 편안함을 준다.

    1800여년 전, 가락국을 세우고 나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등 시조대왕으로서의 대임을 마치고 고단한 몸을 눕힌 수로왕과 허왕후도 가락의 건국신화처럼 캄캄한 무덤 속에서 좀처럼 사실(史實)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글·사진= 이점호 전문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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