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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4) 장유화상(長遊和尙)과 일곱 왕자

허왕후 오빠 장유화상 ‘허보옥’ 속세 떠나 불모산서 오랜 수련
가야산서 함께 도 닦아 지리산서 부처가 되다

  • 기사입력 : 2017-07-24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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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락국 시조대왕 수로와 허왕후는 열 명의 왕자와 두 명의 공주를 두었다. 첫째 왕자는 왕위를 물려받아 거등왕(居登王)이 되었고 둘째, 셋째는 멀리 인도 아유타국에서 시집온 어머니 허왕후의 외로움을 덜어주기 위해 어머니 성(姓)인 허(許)씨를 따랐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왕자들은 어머니의 오빠이자 외삼촌인 장유화상(長遊和尙) 허보옥(許寶玉)을 따라 수도의 길에 올랐다.

    장유화상은 수로왕 57년(서기 98) 일곱 왕자를 데리고 가야산으로 들어가 3년을 수도한 끝에 신선이 됐고 다시 지리산 반야봉(般若峰) 아래 운상원(雲上院)을 짓고 참선에 전념한 지 2년 만인 수로왕 62년(서기 103) 왕자들과 함께 부처가 됐다.

    수로왕은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매우 기뻐하며 지리산까지 친히 들어가 아들들이 수도한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현재의 칠불사(七佛寺) 자리에 칠불선원(七佛禪院)을 세워 왕자들의 득도를 기렸다.

    이러한 이야기는 기록이 미비해 사실로 확인할 길은 없지만 김해지방을 비롯한 옛 가야땅 곳곳마다 장유화상에 얽힌 이름이나 설화들이 수로왕이나 허왕후 못지않게 많다.

    장유동(長有洞:長遊洞에서 변형), 장유산(지금의 胎亭山), 장유사(長遊寺)를 비롯, 서기 103년에 창건했다는 하동의 칠불사도 장유화상과 관련이 깊은 우리나라 불교 역사상 최초의 사찰이라고 전해 온다. 장유화상은 ‘부귀와 영화를 뜬구름과 같이 생각하고 오랫동안 속세를 떠나 노닐며 돌아갈 줄 몰랐다’하여 장유화상이라 불렸다고 한다.

    장유화상은 이 땅에 불법을 처음 전한 스님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장유화상의 사리탑과 영정을 모신 장유사(長遊寺)는 김해시 대청동 불모산(佛母山) 용지봉에 있다.

    장유사의 사리탑 옆에 세워진 가락국사장유화상기적비(駕洛國師長遊和尙紀蹟碑)에는 장유화상과 일곱 왕자들의 행적을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화상의 성은 허씨(許氏)이며 이름은 보옥(寶玉)으로 아유타국 왕자이다. 가락국 시조 수로왕 건국 7년에 보주태후(普州太后) 허씨 아유타국 공주가 부모의 분부를 받고 가야로 건너와서 수로왕의 배필이 되었는데 그때 잉신 등 수십명의 일행을 감호(監護)한 이가 화상이니 태후의 오빠다. 화상은 부귀를 뜬구름같이 보고 티끌 세상을 초연하여 불모산(佛母山)으로 들어가 오래 머물며(長遊) 나오지 않았으므로 장유화상이라고 하였다. 만년에 가락국의 왕자 7명과 더불어 방장산(지리산)에 들어가 성불했으니 지금 하동의 칠불사가 그 장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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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왕후가 바라보자 성불한 일곱왕자의 모습이 나타났다는 하동군 칠불사 내 연못 ‘영지(影池)’.



    ▲장유8경 속의 장유(長遊)

    장유사 대웅전 뒤편에는 장유화상 사리탑이 봉안돼 있다. 경남문화재자료 제31호로 지정된 이 팔각 사리탑은 허왕후의 오빠인 장유화상의 사리를 봉안하고 있는 석조물로 가락국 제8대 질지왕 (451~492) 재위 중 장유암 재건 당시에 세워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1500여년의 오랜 세월 속에 여러 번의 전란으로 암자와 관계유물들은 거의 소실되고 사리탑만이 있었다고 하나, 현존 석탑은 그 제작 수법으로 보아 고려 말 또는 조선 초기의 것으로 보인다.

    창원시와 김해시의 경계인 창원터널을 지나 장유폭포에서 승용차로 꼬불꼬불 산길을 따라 20여분쯤 오르면 김해평야가 한눈에 들어오는 불모산의 연봉인 용지봉 어귀에 이른다. 용지봉 8부 능선에 자리한 장유사 앞마당에서 내려다보는 김해평야와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은 예로부터 장유8경이라 불릴 만큼 순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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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문화재자료 제31호인 장유사 내 장유화상 사리탑.



    ▲운상원 찾은 허왕후

    칠불사(七佛寺)는 수로왕이 부처가 된 일곱 왕자를 위해 지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해발 800m가 넘는 지리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다. 쌍계사가 있는 용강리에서 10㎞ 떨어진 곳이다.

    칠불사에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많다. 일곱 왕자가 수도할 때에 어머니 허왕후는 왕자들이 보고 싶어 자주 칠불사의 전신인 운상원을 찾았으나 오빠인 장유화상이 왕자들의 불심을 어지럽힌다 하여 만나지 못하게 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장유화상이 일곱 왕자들이 부처가 돼 승천(昇天)을 하게 됐다고 전하며 수도원 아래 연못을 가리켰다. 허왕후가 그곳을 보는 순간 연못에 일곱 왕자의 모습이 비치더니 이내 사라져 버렸다. 그리하여 그 연못을 영지(影池)라고 한다.

    후대 사람들이 칠불사의 창건에 얽힌 이야기를 극적으로 만들어낸 애사(哀史)인지도 모른다. 선원(禪院)에서 수도하는 승려들에게 득도를 위해서는 부모 형제와의 사사로운 정을 끊고 수도에만 전념해야 한다는 의미로 가락국의 일곱 왕자 이야기를 만들어 냈을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칠불사 입구의 둥그스름한 영지는 1900여년 전 일곱 왕자들의 모습이 비쳐졌다는 아름다운 전설을 간직한 채 주위의 산과 나무들의 그림자를 가득 담고 영겁의 세월을 지키고 있다. 절 아래쪽 150m 지점에 있는 이 영지는 6·25 때 허물어진 것을 몇 차례에 걸쳐 말끔히 보수한 것이다.

    이런 전설들과 함께 칠불사에는 수로왕과 허왕후에 관련된 지명들이 많다. 당시 수로왕이 일곱 왕자의 성불 소식을 듣고 달려가 머물렀던 곳이 현재 칠불사 아래에 있는 범왕(凡王)마을이며 임시 궁궐인 태왕궁(太王宮)이 있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범왕마을의 유래도 당시 수로왕이 머물렀다는 데서 연유되었고 천비촌(天妃村) 또는 대비촌(大妃村)은 허왕후가 임시로 거처했던 곳이 뒤에 마을을 이루었다는 설도 있다.

    태왕궁과 천비촌 등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일곱 왕자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지형상 지금의 범왕마을 외는 달리 추정할 길이 없는 듯하다.

    칠불사로 가는 길목인 범왕마을에는 최근 ‘대궐터’라는 이름을 붙인 음식점이 생겨나고 마을 사람들도 가야 역사의 한 쪽이었던 역사의 현장에 살고 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칠불사는 임진왜란 때 왜군의 방화로 거의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부휴스님이 다시 중건했으나 지난 1951년 1월 여순반란 때 방화로 아자방 (亞字房)을 비롯한 모든 건물이 잿더미로 변해 그 뒤 30여년 동안 폐허로 버려져 있었다. 지난 1980년대 초반부터 다시 복구작업이 시작돼 이제는 칠불암이 아닌 칠불사로 자리하고 있다.

    글·사진= 이점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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