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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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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역사를 찾아서] (2) 구지봉(龜旨峰)과 개국

새나라 탄생을 노래했던 500년 가야 역사의 성지
구지가 불렀다 전해지는 구지봉
거북 모양 고인돌 세워져 있어

  • 기사입력 : 2017-07-1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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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북 모양의 조그마한 동산인 구지봉. 김해지방의 선주민들이 새 나라 건설을 위해 구지봉에 올라 왕의 강림을 기원하며 구지가를 불렀다.


    ▲설화로 살아 숨쉬는 왕국

    龜何龜何 首其現也(구하구하 수기현야)

    若不現也 燔灼而喫也(약불현야 번작이끽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어놓아라

    만일 내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으리

    지금으로부터 약 2000년 전인 서기 42년(단기 2375) 3월의 첫 뱀날(上巳日), 김해지방의 선주민들이 새나라 건설을 위해 구지봉(龜旨峰)에 올라 왕의 강림을 기원하며 불렀던 구지가(龜旨歌)이다. 이 구지가는 고을 우두머리인 구간(九干)들과 주민들이 왕을 추대하기 위해 춤추며 부르던 노래(迎大王歌)이다.

    수로왕의 탄강신화와 고대 국문학상 중요한 서사시인 구지가를 낳은 구지봉(김해시 구산동 산 81-2)은 가야 500년 역사의 출발지이다. 거북이 머리 모양을 닮았다 하여 구수봉이라고도 하는 정상에는 거북 모양을 하고 있는 청동기 시대의 고인돌 1기가 있는데 한석봉(韓石峰)의 글씨로 전해지는 ‘龜旨峰石(구지봉)’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가락국의 왕도(王都) 김해는 낙동강 하류 삼각주에 위치해 토질이 비옥하고 농산물이 풍부해 이집트의 나일강 하류와 비슷한 곳이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경남 해안지대에는 철기문화의 보급과 함께 사회통합이 진전돼 변한(弁韓) 소국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때 수로왕이 김해지방의 9간(九干)을 통합해 세운 국가가 가락국(駕洛國)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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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지봉 입구에 있는 표지석.

    ▲가락국의 건국신화

    일연선사(一然禪師)의 삼국유사(三國遺事) ‘가락국기(駕洛國記)’는 가락국의 건국을 신화와 함께 시작하고 있다. 이 신화는 서기 전후 시기의 김해지역에서 9간으로 대표되는 지배세력들이 보다 문화능력이 높은 수로집단에 의해 통합돼 가야국이 출현하는 것과 그 뒤의 어느 시기에 김해 가야국을 중심으로 한 연맹체가 형성되는 것을 복합적으로 반영한 설화이다.

    가락국에 이어 경남·북지역에는 △아라가야(阿羅伽倻: 지금의 경남 함안) △소가야(小伽倻: 지금의 경남 고성) △대가야(大伽倻: 지금의 경북 고령) △성산가야(星山伽倻: 지금의 경북 성주, 벽진가야(碧珍伽倻)라고도 함) △고령가야(古寧伽倻: 지금의 경북 상주) 등 나머지 5가야가 차례로 들어섰다.

    ‘가락국기’에 의하면 당시 국토의 경계는 동쪽이 황산강(낙동강), 서남쪽은 청해로 큰바다에 접해 있었으며 서북쪽은 지리산, 동북쪽은 가야산을 경계로 삼고 남쪽은 나라의 끝이었다고 한다. 지금의 김해평야 대부분은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바다가 만입돼 있었으나 1930년대 이후에 낙동강변에 제방이 쌓여지고 하구에 몇 개의 수문이 만들어지면서 평야로 탈바꿈했다.

    김해지역에 관한 고고학과 지리학적 연구에 의하면 현재의 김해평야 대부분은 신석기 중기에 형성된 고김해만(古金海灣)이었다. 지금까지 확인된 수가리패총, 범방패총, 농소리패총, 회현리패총, 부원동패총, 예안리패총 등은 대개 해안에 인접해 있던 유적으로서 이들 패총에서 확인되는 조가비의 대부분은 바다에서 채취할 수 있는 것들이다. 따라서 이들의 유적을 선으로 연결해 보면 9간사회 또는 가락국 초기의 해안선이 복원될 것으로 보인다.



    ▲구지봉의 영신제의(迎神祭儀)

    김해는 가야의 얼과 자취가 살아 숨쉬는 땅이다. 낙동강 하류의 기름진 충적평야에 자리한 김해는 남해를 관문으로 삼아 일찍이 고대문화가 뿌리내려 수많은 유적이 산재한다. 더욱이 이 유적들은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 가야사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김해지방의 아름다운 명승지로 일컬어온 금릉팔경(金陵八景) 가운데 일곱 번째인 구지석람(龜旨夕嵐: 구지봉의 저녁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을 밟으며 구지봉을 찾은 탐방객 앞에 펼쳐진 가야역사는 온통 안갯 속에 묻혀 있다.

    구지가를 중심으로 하는 가락국의 건국 신화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영신제의(迎神祭儀)는 수로왕 출현 이전부터 있어온 주술적 제의(祭儀)가 수로왕 강림으로 각색된 것은 아닐까.

    이러한 추론은 당시 9간사회의 농경과 어로를 생활수단으로 하는 사회적 배경에 따라 풍작과 풍어를 기원하는 풍요제의(豊饒祭儀)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구지봉은 수로의 강림 이전부터 9간사회의 성스러운 구역으로서 존재해 왔으며 이러한 지역적 전통이 수로왕의 출현과 함께 가락국의 건국신화로 발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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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지봉 입구에 있는 구지가(龜旨歌)인 영대왕가비(迎大王歌碑).

    ▲끊긴 신성지맥(神聖地脈) 다시 이어

    가락국의 왕도였던 김해는 개국에서 멸망에 이르기까지 500여년간의 유적 유물들이 숱하게 널려 있다. 그중에서 제일 손꼽히는 유적이 구지봉이다.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의 천강난생신화(天降卵生神話)가 시작된 구지봉(龜旨峰). 창원과 부산을 잇는 국도 14호선 옆에 있는 구지봉은 서기 199년까지 158세를 살면서 나라의 기틀을 세운 김수로왕의 탄강성지(誕降聖地)로 보호 중이다. 구지봉은 동편으로 뻗은 능선을 따라 분산(盆山 또는 盆城山)과 이어진다. 김해시의 한가운데에 위치한 분산의 영봉이 서남쪽으로 흘러내려 거북 모양의 조그마한 동산으로 끝맺음한 해발 35m의 봉우리다.

    구지봉은 원래 북동편의 허왕후릉(許王后陵)과 이어져 있었으나 일제(日帝)가 1920년에 도로공사를 구실로 지맥을 끊어 구지봉의 머리와 허왕후릉의 몸체를 갈라놓았다. 구지봉과 허왕후의 능 사이를 잘라 마치 거북 목이 잘린 꼴이 되어 성지(聖地)로서의 가운을 잃게 만든 것이다.

    그러나 정부가 지난 1990년 도로를 터널식으로 만들어 터널 위에 흙을 채우고 나무를 심어 맥이 끊긴 지 실로 70여년 만에 어느 정도 성지로서의 기능을 회복했다. 그러나 거북의 머리인 구지봉과 몸체의 연결이라는 신성지맥(神聖地脈) 복귀의 현장은 밑으로 뚫린 터널에 무수한 차량과 사람의 통행으로 어쩐지 어색해 보인다.

    가락국 500년 왕도였던 김해. 무분별한 도시개발로 파헤쳐진 곳곳마다 유물 유적들이 널려 있고 가야의 애틋한 설화와 숨결이 서려 있지 않은 곳이 없다. 그러나 신라에 빼앗겨 버린 역사의 제모습을 갖출 날은 언제쯤이나 될지 기약 없는 오늘의 잊혀진 가야왕국이다.

    글·사진= 이점호 전문기자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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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점호(64) 전문기자는 1979년 경남신문 수습기자로 입사, 2001년 편집국장을 역임했다. 2001년 사단법인 경남문화연구원을 설립해 전통문화 보급 활동을 하고 있다. ‘잊혀진 왕국 伽倻’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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