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우식 선생
이우식(李祐植, 1891년 7월 22일~1966년 7월 5일) 선생의 호는 남저(南樗)이고, 의령 출신이다. 선생은 1918년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東京) 세이소쿠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도요대학(東洋大學) 철학과에 입학했다.
1919년 3·1혁명이 일어나자 의령읍 장날인 3월 14일을 기해 구여순(具汝淳)·최정학(崔正學) 등 동지들과 의령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이튿날까지 격렬한 시위를 벌인 다음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1920년 귀국해 부산에서 안희제(安熙濟)·김효석(金孝錫) 등과 함께 백산무역주식회사를 설립해 경영하면서 비밀리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자금을 지원했다. 또한 한인은행 설립을 추진하기도 했다.
1926년에는 서울에서 ‘시대일보’, 1927년에는 ‘중외일보’를 창간해 경영하면서 민족의식 고취에 노력했다. 1929년 10월에는 조선어연구회(조선어학회의 전신)의 조선어사전편찬회에 가입해 지원했다.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의 편집비를 지원했으며, 1930년 경남은행장, 원동무역사(元東貿易社) 사장을 역임했고, 1935년에는 이인(李仁)·김양수(金良洙)·장현식(張鉉植) 등 14명과 함께 조선어사전 편찬 촉진을 위해 비밀후원회를 조직했다.
1942년 1월 이윤재(李允宰)·이극로(李克魯)와 더불어 인재 양성을 위해 조선양사원(朝鮮養士院)을 조직해 운영자금과 전답을 기부했다. 그해 10월에 일제가 민족말살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어 말살정책을 대폭 강화하고 애국지사들을 탄압하기 위해 만들어 낸 ‘조선어학회사건(朝鮮語學會事件)’으로 구속돼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와 함흥경찰서에서 혹독한 고문과 악형을 받고, 함흥지방법원에서 1944년 12월 21일부터 이듬해 1월 16일까지 9회에 걸쳐 니시다 시요오고(西田勝吾)의 주심으로 재판이 열렸다. 법원은 다음과 같이 판결했다.
이극로(징역 6년), 최현배(징역 4년), 이희승(징역 2년 6월), 정인승·정태진(징역 2년), 김법린·이중화·이우식·김양수·김도연·이인(징역 2년, 집행유예 4년), 장현식(무죄).
이 판결에 따라 집행유예 이하의 6명은 곧 석방됐다. 실형을 선고받은 5명은 정태진을 제외하고 1945년 1월 18일에 항소했으나, 8월 13일 항소가 기각됐다. 그러나 이틀 후인 8월 15일 일본의 무조건 항복에 따라 8월 17일 풀려났다.
조선어학회사건은 일제가 날조한 사건이긴 하나, 1940년대의 민족문화말살정책 하에서 민족문화의 정수인 우리말·우리글을 지키기 위한 문화운동의 성격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어학회가 간행하던 <한글>지가 1942년 5월 1일 통권 93호로 중단됐고, 추진 중이던 조선어사전 편찬이 중단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우리 민족이 이윤재·한징 두 분의 민족문화수호의 순국열사를 맞게 되었던 것은 개인적으로는 아픔이지만 민족적으로는 광영(光榮)이 아닐 수 없다고 할 것이다.
남저 선생은 귀향해 영우회(嶺友會)를 조직해 향토문화 발전에 노력했고, 뒤에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국문학 연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경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