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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6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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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며] 무논을 놀릴 수는 없고…- 이문재(경제부장)

  • 기사입력 : 2017-05-1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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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석(千石)꾼, 만석(萬石)꾼. 한 해 곡식 천·만석을 거둬들일 만큼 땅과 재산을 많이 가진 부자를 이르는 말이다. 농경시대에는 땅이 곧 부와 권력의 척도였다. 국가도 마찬가지로, 고대에 빠끔한 날 없이 싸움질을 해댄 것도 따지고 보면 땅 때문이다. 땅이 넓어야 먹을 것을 많이 생산할 수 있고, 이를 통해 힘을 가지고 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군왕이 공신들에게 땅을 뚝뚝 떼어주고, 대신 충성심을 요구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산업사회가 되고, 경제가 글로벌 무역체계로 재편됐지만, 땅 큰 나라가 여전히 강한 것을 보니 땅의 힘은 아직 유효한 모양이다.

    집안 얘기지만 대개의 처지가 다르지 않으리라 들먹인다. 도시에 사는 처남은 요즘 죽을 맛이란다. 본인도 생업이 있어 하루가 빠듯한데 농사일 때문에 시골에 매일 다니느라 힘이 든 모양이다. 처가 어른들은 연로하시고, 그렇다고 땅은 놀릴 수가 없는 노릇이라 힘이 들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한다. 일손을 구하기가 하도 힘들어 최근 들어 양파나 마늘 등 몇몇 농사를 포기도 했지만, 그래도 무논을 놀릴 수는 없다는 게 어른들의 바람이다 보니, ‘울며 겨자 먹는’ 처남의 처지가 참으로 딱해 보인다. 장남인 처남의 입장에서는 땅이 얼마나 원망스러울까. 물론 땅이 생활의 근원이었고, 많은 땅이 뿌듯하고 자랑스러웠던 시절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피할 수 없는 힘든 노동의 대상일 뿐일지도 모를 일이다.

    처남과 같이 대다수 농민들은 요즘 땅이 원망스럽다. 빈 논으로, 빈 밭으로 놀릴 수가 없어 이것저것 심어 보지만 대개가 만족스럽지가 않다. 쌀은 이미 경쟁력을 잃은 지 오래고, 대체작물이나 채소·과일도 걸핏하면 가격이 폭락해 낭패를 보고 있다. 올해 청양고추의 경우만 해도 가격 안정을 위해 농민 스스로가 과잉물량을 땅에 묻고, 관련 기관에서도 발 빠르게 대처했지만 농민들의 처지가 좋아졌다는 얘기는 아직 듣지를 못했다.

    곳곳에서 모내기가 시작됐다. 특별한 자연재해가 없다면 올해도 풍년이 예상된다. 예상 생산량 400만t 중 300만t 정도를 소비하더라도 100만t이 남는다. 현 재고량이 350여만t이니 450만t 정도가 쌓이게 된다. 여기에 쌀 시장 개방으로 떠안은 최소시장접근물량 (MMA)인 수입쌀 41만t을 보태면 500만t을 창고에 보관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정부가 ‘억지 만석꾼’이 되는 꼴이다. 쌀 재고 누적은 생산 증가와 소비 감소가 주원인이다. 1인당 연간 쌀소비는 1980년 132.4㎏에서 2015년 62.9㎏으로 69.5㎏이 감소했다. 정부와 농업관련 기관들이 쌀 소비촉진과 적정생산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소비자의 입맛을 끌기 위해 쌀 가공식품을 개발하고, 적정생산을 위해 맥류·두류·사료작물 등 대체작물 전환과 고품질 쌀 생산을 권유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명쾌한 해법이 되지 못하고 있고, 때문에 수매가를 놓고 벌어지는 정부와 농민들의 갈등은 연례 행사가 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당시 농업 관련 공약으로 농어업특별위원회 설치를 비롯해 쌀 목표가격제 인상, 쌀 생산 조정제 도입, 주요 농산물 생산안정제 도입 추진 등 기존 농업정책의 틀을 획기적으로 전환할 것을 약속했다. 농민들의 주름살을 펴게 할 답은 나와 있는 셈이지만, 공약이 이뤄질지가 관건이다. 내년에는 처남을 비롯한 농부들의 고된 탄식이 조금이라도 줄어들까.

    이문재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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