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9일 (금)
전체메뉴

[작가칼럼] 선물- 이현우(시인)

  • 기사입력 : 2017-05-12 07:00:00
  •   
  • 메인이미지

    ‘영도다리 드는 다리/ 오포 울기 전에/ 아빠는 공장 가고/ 엄마는 장에 가고/ 나만 혼자 집을 보는/ 오늘은 배고픈 어린이날 ….’

    1960년대 초, 경남 어린이 백일장에서 장원한 작품 일부다. 그 시절의 아이들은 어린이날을 생일보다 더 애타게 기다렸다. 배급 나온 옥수수죽으로 끼니를 때우던 아이들에게 이날만은 그나마 여유 있는 학부형들이 선물을 보내주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가. 교실은 오랜만에 왁자지껄하게 활기가 넘쳤다. 저마다 먹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것들을 얘기하며 한껏 들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 반 저 반에서 환호성이 터질 무렵, 우리 반은 정반대로 조용해져 갔다.

    담임선생님은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계시다가 교무실로 가셨고, 우린 고개를 숙인 채 혹시나 올지 모를 선물을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아무도 나타나지 않았다.

    가정 형편상, 우리 반에는 과자 한 봉지마저 사다 줄 부모님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날 그 순간, 고요하고 쓸쓸한 교실에서, 맥없이 엎드려 낙서를 하거나 김빠진 장난을 치거나 연필을 깨물던 아이들의 심경은 모두가 한가지로 같았으리라.

    얼마 후, 다른 반 아이들이 아우성치며 운동장으로 내달을 즈음 선생님이 돌아오셨다. 선물 상자를 메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춤추는 장난감 ‘코주부 아저씨’를 교탁에 올려놓고는 환하게 웃으셨다. 우리는 일제히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신나게 어린이날 노래를 합창했다. 순식간에 교실 안은 딴 세상이 되었다.

    “누구 엄마가 사주셨어요?” 과자를 입에 문 아이들이 궁금해하자 “음, 그냥, 그런 분이 있단다”라고 얼버무리던 선생님의 그 마음 그 목소리가 지금도 생생하다. 그날의 비스킷과 사탕은 내 일생에서 가장 맛있게 먹어본 음식이다.

    어쩌다 추억의 태엽을 풀면, 북치고 나팔부는 ‘코주부아저씨’가 교정에서 맨 먼저 걸어 나와 희끗희끗한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자칫 슬픈 추억이 될 수도 있었던 어린이날을 기쁨으로 바꾸어 준 연금술사는 다름 아닌 선생님이었음을 당시의 우리는 알지 못했다. 그로부터 많은 세월이 흘렀다. 인정을 법으로 규제하고, 스승에게 드리는 꽃 한 송이조차 죄가 되는 나라에서, 각박한 현실을 볼 때마다 나는 습관처럼 그리운 선생님의 아픈 미소를 떠올린다. 아무것도 모르고 마냥 즐거워하는 제자들을 바라보며 눈물 글썽이던 참사랑을 되새긴다.

    선물은 밤을 새우며 써 놓은 편지 같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 오래도록 광채가 난다. 거기에는 의례를 넘어 상대의 마음까지 헤아린 온기가 스며 있기 때문이다. 굶주림에는 먹거리가, 슬픔에는 위로가, 억눌림에는 자유가, 외로움에는 함께하는 것 또한 선물 중의 선물일지니 결국 선물이란 물질만이 아닌 것이다.

    절대빈곤 속의 아픈 일화를 겪지 않아도 되는 요즈음, 우리는 과연 누구와 어떤 선물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을까. 포장에 현혹돼 의미를 경시하는 작금의 세태에서 감동 어린 선물을 가슴속에 간직한 이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이현우 (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