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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6월 28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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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블루스 3 나의 이름은 청춘] 3년간 5개 대륙 여행한 박재병씨

상처받고 떠났었죠… 치유받고 돌아왔죠

  • 기사입력 : 2017-04-11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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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주 집현면 출신 촌놈이에요. 부모님은 농사를 지으셨고, 위로 누나가 네 분 계시고 제가 막내. 외동아들이죠.” 약 3년 동안 5개 대륙을 여행했다. 노숙자도 되어 봤고 대통령도 만나 봤다. 할리 데이비슨을 몰고 미대륙 1만2000㎞를 달렸다. 그동안 늘어난 SNS 팔로워가 2만명이 넘는다. CBS, BBC 등 해외 언론 취재가 10차례 넘게 진행됐다. TED 강연 제의도 받았다. 박재병(29)씨가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는 지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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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를 시켜 자리에 앉자마자 재병 씨가 자기 소개를 시작했다. “뭔가 화려해 보이겠지만요, 기자님, 저는 사실 진주 골짜기 촌놈이에요.”

    그래서 촌 이야기부터 해보기로 했다. 시골에서 자란 재병씨가 세상을 향해 느꼈던 첫인상은 ‘상대적 박탈감’ 같은 것이라고 했다. “학교 다닐 때 가끔 아버지가 거름이 잔뜩 실린 경운기를 타고 저를 데리러 오셨어요. 다른 친구들 아빠는 매끈한 승용차를 몰고 왔고요. 묘한 감정이 들더라고요. 아시다시피 농사라는 업이 빚더미에 앉는 거랑 다르지 않잖아요. 노력 여부에 따라 이윤이 극대화되는 일도 아니고.” 자라면서 누나들과 약속했다. 우리가 가난의 고리를 끊자. 우리 대(代)에서 빚을 끊어내자. 여러 가지 구상을 해봤지만 가장 빠른 길은 대기업에 취직하는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다. 그것이 가장 실현 가능성이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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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재병씨가 히치하이킹을 하고 있다.

    그러려고 했다. 그렇게 살려고 했었다. 대학 졸업, ROTC 전역을 앞두고 있던 그 무렵까지는 말이다. 악재는 반드시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모습을 드러내고야 마는 것인가. 친구와 사랑했던 여인, 매형을 한꺼번에 잃었고 아버지가 쓰러졌다. “가장 친했던 친구와 여자친구가 저 몰래 만나고 있었어요. 그 장면을 제가 목격했어요. 관계를 끊었죠. 그땐 그게 얼마나 아픈 거였는지, 두 사람을 제 인생에서 도려내야만 했어요.”

    곧 큰누나가 이혼을 했다. 사람 좋던 매형은 무려 10년 동안 식구들을 속이며 외도를 했다. 외도에 쓰인 돈에는 재병씨 아버지가 농사를 지어 마련한 돈도 상당 부분 포함돼 있었다. 아버지가 몸져 누웠고 집이 쑥대밭이 됐다.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졌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는데, 잡을 지푸라기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2014년 도망치듯 아일랜드로 떠났다. “일종의 도피죠. 도저히 여기서는 못 살 것 같았어요. 아일랜드가 비교적 취업이 쉽다는 정보를 접했거든요. 완전히 떠나버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뭐, 촌놈이 외국 가서 신세계 만난 거죠. 신나게 놀았는데, 놀다 보니 돈이 한 푼도 안 남았더라고요.” 손 벌릴 곳이 없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헤럴드 신문을 떼와서 팔기 시작했다. 신호 대기 중인 차량 사이를 뛰어다니며 차창 틈으로 신문을 넣어주고 돈을 받았다. 식당에서 설거지도 하고 초밥도 만들며 하루 13시간씩 일했다. 죽지 않을 만큼의 생계비가 손에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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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날 밤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노숙자 한 명을 만났다. 발이 멈췄다. 처마 밑에 앉아 비를 피하는 노숙자의 모습이 어디선가 많이 본 듯 익숙했다. 꼭 거울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상한 힘에 이끌려 옆에 앉아 말을 걸었다. 난생처음 있는 일이었다. 별 말 아닌 말들을 주고 받았는데,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신뢰가 무너진 뒤, 사람에게 만큼은 기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던 시기였다. “그때 어떤 생각이 스쳤어요. 가장 낮은 지위에서부터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을 두루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자. 모두 다른 처지지만 관통하는 무엇이 있지 않을까…하는.”

    인터뷰를 시작했다. 노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블로그에 이 경험들을 차곡차곡 기록하기 시작했다. 8개월 동안 멈추지 않았다. 허름한 옷을 입고 거리에 나앉아 직접 노숙자가 되어 보기도 했다. 경찰에 연행도 몇 차례 될 뻔했다. 이 기행이 차차 알려지면서 아일랜드에서 유명인사가 됐다. 이때 TED 강연 제의도 받았다. “노숙은… 즐거운 경험이었다고는 절대 표현할 수 없어요. 수백명에게 무시를 당했어요. 투명인간처럼… 존재 자체가 없는 것 같은 느낌. 자아가 죽어 가는 기분이었는데, 끔찍했어요. 그때 진심으로 노숙자들을 이해했어요. 왜 재활 프로그램을 해도 나아지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지. 존재를 무시당하면 삶이 파괴된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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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동안 5개 대륙을 여행한 박재병씨가 김해 연지공원 인근에서 평소처럼 카메라와 배낭을 맨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이후 아일랜드를 떠나 유럽에서 6개월, 남미에서 6개월을 머물며 두 대륙을 히치하이킹으로 횡단했다. 이 시기에는 막대한 부(富)를 쌓은 CEO들을 인터뷰할 기회가 많았는데, 마침내는 ‘별 게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했다. “돈이 아무리 많아도 걱정이 태산이더라고요. 힘든 일도 많고요.” 돈을 벌어서 가난의 고리를 끊으면 끝인 줄 알았는데, 그것만도 아닌 것 같았다.

    호세 무히카(Jose Mujica) 우루과이 대통령을 무작정 찾아갔다. ‘세계에서 가장 검소한 대통령’이라고 알려진 호세 무히카. 사저 입구에서 경호원에게 저지당했다.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 날 다시 찾아갔다. “묘한 인연이었어요. 마침 사저에서 볼리비아·우루과이 수교 기념 다큐를 촬영하고 있었어요. 제가 영어 한국어 온갖 말을 써가며 떠드니까 제작진이 저한테 흥미를 보이더라고요. 제 사연을 알아들은 PD가 제작진에게 허락된 시간 중 10분을 저에게 할애해줬어요.” 제작진을 따라 사저로 들어갔다.

    그렇게 대통령을 만났다. 호세 무히카는 이 패기 넘치는 이국의 젊은이에게 무슨 이야기를 해주었을까? “에스파냐어를 모르니까, 일단 그의 말을 녹음해 와서 따로 번역을 했어요. 그러니까 인터뷰를 마친 한참 후에야 그가 저에게 무슨 말을 해주었는지 알게 되었죠. 평범하게 살라… 그게 그가 저에게 준 금과옥조였어요.”

    호주를 거쳐 미국으로 넘어갔다. 할리 데이비슨을 사서 오토바이 일주를 다녔다. 이것도 기행이라면 기행일 테지만 오바마 대통령을 만나러 간 건 참으로 탁월한 기행이었다. “하루 10시간씩 20일 동안 백악관 앞에서 기다렸어요. 어느 누구도 물리적으로 저를 막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날이 갈수록 점점 경비가 삼엄해졌어요.” 당연히 오바마는 응답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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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일랜드에서 노숙자들과 함께하는 박재병씨.


    정공법이 통하지 않으면 변칙을 써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바마! 당신의 5분을 내가 사겠다. 5분만 만나주면 너의 이름으로 5년 동안 좋은 일을 하겠다’는 팻말을 써서 들고 서 있었다. 그러던 중 트럼프가 백악관의 새 주인이 되었다. “오바마 자택으로 편지를 100통 보냈어요. 매일 내가 무엇을 했는지, 얼마나 당신을 만나고 싶은지를 적었어요.” 뜻밖에도 오바마의 답신은 재병씨가 한국에 돌아온 후에 도착했다. “너의 길을 끝까지 가라고 적혀 있었어요. 만나주겠다는 말을 기대했었는데 말이에요. 하하하.”



    경영학과를 나온 탓에, 친구들 대부분은 금융권에서 일하고 있다. 그들은 좋은 차를 타고 재테크를 말한다. 재병 씨는 다른 삶을 살고 있다. 한국에 돌아온 지금은 여행사 마케팅 자문을 맡아 용돈을 번다. 디지털 노마드가 되어 카페를 전전하며 여행 경험을 책으로 쓰고 있다. 얼마 전엔 갖가지 여행팁을 엮은 e-book을 출간해 팔로워들에게 무료로 배포하기도 했다. 무척 불안하다. 하지만 괜찮다. 내가 선택한 불안이니까, 라고 그는 덧붙였다. “친구들은 겉으론 괜찮아 보였지만 속으로는 끊임없는 권태와 무기력에 시달리고 있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권태나 불안이나 자신이 선택했다면 무엇이든 괜찮다고 생각해요.” 이제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그는 여러 가지 포부들을 열거했다. 모두 획기적이고 참신한 계획들이었지만, 기자에게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선한 사람이 선한 사람을 돕게 하는 재단을 설립하겠다’는 공언이었다.

    “제 삶의 변곡점이 된 일이 있었어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노숙자와 인터뷰를 했는데, 그가 저에게 근사한 밥을 사더니 가지고 있던 돈을 모두 줬어요. 그 돈이 그의 전부라는 걸 저는 알고 있었어요. 받지 않으려 했지만 ‘나도 누군가에게 꼭 한 번은 베풀고 싶다’며 돈을 놓고 사라졌어요. 계속해서 그를 찾아 다녔어요. SNS로 수소문하고 커뮤니티에 글도 올리고… 그 일대의 노숙인들은 모두 찾아가 확인했지만 끝내 그를 만나지 못했어요. 인간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후에 경계하고 의심하면서 만났던 사람이었어요. 하지만 그의 선의가 저를 울렸어요. 그에게 받은 선의를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고, 계속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선의가 맞물리는 일, 바로 그거예요. 역설적이게도 그것이 바로 사람을 피해 도피했던 제가 사람들 사이에서 찾은 답이기도 해요.”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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