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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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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기자 25시] 49기 박기원 (2) 계륵

  • 기사입력 : 2017-03-28 14:3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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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습기자는 계륵 같은 존재다. 경험이 없어 요긴하게 써먹을 수 없다. 그렇다고 가만히 앉혀 둘 수도 없다. 사용처가 불분명한 수습은 중한 업무를 맡기 위해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한다. 매일 아침 회사 앞에 도착해 다짐한다. 오늘도 내 몫은 해내자고. 계륵이 되지 말자고.

    지난 일주일 동안 입보다 귀를 많이 열었다. 선배님들의 가르침을 귀 쫑긋 세워 머릿속에 새겼다. 긴장한 탓인지, 많은 것을 들은 탓인지 돌아서면 희미해져버리는 기억을 되찾으려 애쓴다. "선배님 잘 못 들었습니다"를 연신 반복한다. 교육대에 갓 입소한 신병마냥 수습은 종일 얼어있다. 찬바람이 물러나 봄기운이 느껴지는 날도 수습은 한기를 느낀다. 사소한 말 한마디라도 주워 담으려 애쓰지만 기억은 머릿속에 잠시 머물다 갈 뿐이다.

    달아나는 기억을 붙잡는 것은 수첩이다. 수습기자의 수첩에는 뭔가 빼곡히 적혀있다. 흑과 백, 필요한 것들과 불필요한 것들이 뒤섞여 있다. 내용의 핵심은 없고 맥락만 있다. 그때그때 들었던 내용을 휘갈기듯 받아 적는다. 내 눈은 상대방에 고정돼 있지만 손은 수첩 위에서 대중없이 분주히 움직인다. 내 글씨인지 남의 글씨인지 모를 이형 문자를 집에 돌아와 번역을 한다. 번역을 통해 큰 수첩에 옮겨 적으며 기억을 떠올린다. 휘갈긴 단어지만 그것을 보면 이야기의 핵심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 수습을 시작한 지 이주일. 펜은 점점 빨라지고, 글자는 점점 규칙을 찾아 가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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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습기자가 되면서 핸드폰을 바꿨다. 스마트폰 인생 전부를 차지한, 내가 사랑했던 애플사 제품은 통화 중 녹음이 되질 않는다. 메모보다 강력한 기억의 매개체는 단연 녹취였다. 경찰서에서 취재원과 녹취를 하며 통화하는 선배를 곁에서 봤다.

    그 녹취가 결국 사실관계를 바로잡고 뒤틀어진 기억을 바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보았다. 뒤도 볼 것 없이 핸드폰 매장으로 향했다. "통화 중 녹음이 되는 최신형 핸드폰 주세요. 저렴한 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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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개 고백도 했다. 정치부 교육으로 창동을 방문한 날 고백했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간 MBC 공개 스튜디오에서 라디오 생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전파를 통해 들었던 투명한 복자씨의 목소리는 전파를 거치지 않고 내 귀에 직접 들어왔다. 복자씨는 태연하게 수습기자 3인방을 '경남신문 넥타이 부대'라 불렀다. 우리는 부대원이 됐고 그렇게 인터뷰했다. 불과 1분 상간이었다. 순간 마이크는 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어떤 기자가 되고 싶냐는 복자씨의 기습 질문에 도민과 함께 울고 웃는 기자라 답했다. 다급함이 뒤섞인 교과서적인 대답이었다.

    준비 없이 내 입 밖으로 튀어 나간 말이라 최소한 진심이라 생각한다. 복자씨의 환한 미소를 끝으로 인터뷰는 끝났고 신청곡인 퀸의 'I want to break free'가 스튜디오를 메웠다. 아니 창동 거리를 가득 메웠다. 뒤돌아서 마주한 선배님의 입가에는 엷은 미소가 있었다.

    전파는 생각지 못한 곳까지 멀리 날았다. 친구 놈 몇몇이 축하한다고 전화 왔다. 멋쩍었다. 공부한답시고 결혼식에도 가지 못했던 친구 놈 전화였다. 전파를 통해 친구에게도 약속한 셈이 됐다. 너와 내가 함께 울고 웃자고. 더 자주 웃자고.

    마냥 계륵이라 생각했던 내게 회사에서 과분한 임무를 내렸다. 창간 71주년 기획이다. 3인의 '수습기자들이 본 세상'이란 제목으로 한 면을 채우는 기사였다.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섰지만 분명 흥분되는 일이었다. 동기들이 모여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주고받았고, 세상은 한 줄 한 줄 느리게 채워져 갔다. 3인이 세상을 보는 시각은 제각각이었다. 시각은 제각각이지만 문제의식에 대해서는 3인이 한목소리를 냈다.

    깊은 곳까지 닿을 수는 없었지만 우리가 바꿔나가야 하는 것들이 많다는 걸 분명히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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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년 3월 2일자 창간 71주년 특집호 25면

    몇 주 간 회사 안팎에서 새로운 것들과 마주했다. 새로움의 감정은 복합적이었다. 경남신문이라는 큰 퍼즐을 하나씩 맞춰가는 느낌을 받았다. 회사 구성원들의 열정이 모여야만 완성된 퍼즐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큰 퍼즐의 한 조각을 채우기 위해, 내 몫을 해내기 위해, 계륵이 되지 않기 위해 수습기자는 내일도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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