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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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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촉석루] 회상(回想)- 이명자(김해문화의전당 사장)

  • 기사입력 : 2017-02-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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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이켜보면 그립지 않은 순간이 없다. 놀이보다 일을 먼저 배운 어린 시절이었기에 일이 곧 삶이었다. 그러니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 들판에 나가 모를 심고, 벼를 베고, 이삭을 줍고, 추수를 하고, 보리를 파종하는 그런 것들이 먼저 떠오른다.

    취학하고 나서도 학교가 파하는 동시에 부리나케 집에 가 논밭에 나가 일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일손이 달리는 집안에서는 농번기가 되면 아예 학교도 못 가게 하고 일을 시키는 것이 다반사였다. 그나마 학교에 보내는 집은 교육열이 있는 부모였을 것이다.

    공직에 나가서도 새마을운동 일환으로 초가지붕을 거둬내고 슬레이트지붕을 잇는가 하면 길을 넓히고, 통일벼를 심고, 사방공사(砂防工事)하는 것이 읍면동 행정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때 공무원은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보다 마을에 나가 일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높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신작로 주변 농사는 공무원이 짓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공무원이 종자 파종부터 추수까지 다 챙겼다. 국가의 철저한 관리와 공무원의 이런 열정이 있었기에 단군 이래 처음으로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뤄 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즘 아이들에게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그때는 먹을 게 없어서 밥도 제대로 못 먹었다”라고 말하면, “그럼 라면 삶아 먹거나 햄버거 먹으면 되지”라고 답한다고 한다. 모든 게 풍요로운 요즘 아이들에게 그 시절 이야기는 우리 때 호랑이 담배 피운다는 말과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나 가끔 그때가 그립다. ‘아부지’가 술 한잔 거나하게 하고 들어와서는 “우리 자야, 사탕 하나 주까?” 하면서 던져 주시던 십리사탕도 그립고, ‘어무이’가 건네 주시던 비료포대 종이에 둘둘 만 엿도 그립다. 그때는 무엇이든 귀했기 때문에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런 습관 때문인지 지금도 쉽게 버리지 못한다. 버리려 하다가도 나중에 어딘가 쓸 것 같아 다시 그 자리다. 가만히 생각하니 지난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 결과다. 올봄에는 결심을 해야겠다. 묵은 먼지를 털고, 상큼하게 봄을 맞이하기로….

    이명자 (김해문화의전당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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