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여순 선생 등의 재판과 관련한 일본법원 판결문.
지난 1월 기준 경남(부산·울산 포함) 출신 독립유공자로 훈·포장이나 표창을 받은 이는 모두 1110명에 달한다. 하지만 대부분 유공자들의 일생은 알려지지 않은 채 개인·가족사에 그치고 있다. 본지는 독립유공자들의 삶을 소개해, 조국을 위한 그들의 희생과 헌신을 오늘날 살아가는 우리들의 표상으로 삼고자 한다. 필자인 김길수 교수는 “독립유공자의 삶을 통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을 알리고, 이를 통해 애국심과 자긍심을 고취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김길수 교수와 함께 만나는 경남독립운동가’는 매주 1회 게재될 예정이다.
▲의령 3·1운동의 기폭제 역할
의령 3·1운동의 지도자이자 일제강점기 반일투쟁 지도자 구여순(具汝淳·1892~1946) 선생 순국 70주년이 엊그제였다. 선생의 호는 일정(一丁), 수많은 가명으로 반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인물이다. 선생의 본적은 당시 진주군 진주면 중안동 192번지, 주소는 의령군 의령면 동동 901번지. 선생은 진주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1919년 3월 3일 상경해 ‘독립선언서’를 갖고 3월 12일 의령으로 내려온 그는 독립만세시위를 위해 동분서주했다.
선생은 동지 최정학(崔正學)·전용선(田容璿)·최병규(崔秉圭) 등과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의령군 용덕면사무소에서 만들어 의령읍 장날이었던 14일 이를 배포, 장꾼 700여명이 열렬히 호응했다.
‘피고 전용선·최병규는 의령군 용덕면 서기인데 의령면에 사는 구여순·최정학 등의 요구에 응해 비밀히 조선독립에 관한 선언서를 인쇄할 것을 공모하고(중략) 대정 8년 3월 12일 의령군 용덕면사무소에서 동 면사무소 비품인 등사판을 사용해 반포할 목적으로 비밀히 위 인쇄물을 복사하고 동 선언서 약 100통을 인쇄했다.(중략) 대정 8년 3월 14일 오후 의령 읍내 시장에서 약 700명의 군중이 조선독립만세를 고창하면서 시장을 누비고 행진했다.(국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자료집’ 5권, 1249~1250쪽)
선생은 이튿날도 만세시위를 계속하다가 많은 사람들과 함께 피체됐는데 그중 9명은 투옥돼 재판을 받았다. 1919년 4월 26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최정학과 함께 징역 2년이 선고되자 이에 불복해 공소를 했는데 그 취지서가 그의 기상을 엿보게 한다.
‘병합이 아직 10년이 되지 않았는데 자유의 함성을 듣고 어찌 조선독립을 위해 만세를 부르지 않겠는가? 그리고 만세를 부르는 것이 보안법 위반이라고 알고 있으나 의무를 지키는 자에게 어떠한 죄가 되지 않는다고 믿고 이에 상고 취의서를 제출한다.’
일제는 수많은 투옥자를 수용하기도 어려웠지만 국제연맹에 가입한 나라의 눈치를 봐서 특별사면을 했는데 선생도 1년이 감형돼 1년 만에 출옥했고, 그 후 서울 중동학교 재학 중 대한적십자사 등의 단체에 가입해 반일활동에 가담했다.
▲의열단원 활약·친일파 청산 노력
선생은 1922년 상해로 가서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과 만나 이듬해 8월 입단하고 12월에 조선총독부 중요 관서를 파괴할 목적으로 동지들과 국내에 잠입해 제3차 의열단 의거를 진행하다가 피체됐다.
‘피고 구여순은 대정 12년(1923년) 초여름 상하이(上海)에서 다수 공동으로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운동을 하기 위해 조직된 의열단에 가맹하고, 같은 해 9월 중순 북경 기하로지(騎河路志) 화공연(和公宴)에서 의열단 수령 김원봉과 회합하고…’(국가기록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관리번호 CJA0000748, 문서번호 771807)
1924년 2월 28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 4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른 선생은 1928년 출옥 후 김용호·남호섭·이태수·최철용 등과 반제지방단부(反帝地方團部)를 조직해 위원장으로 추대됐고, 이듬해 5월에는 의령기근구제회와 신간회 의령지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한편 비밀리에 광복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모금하는 활동을 전개해 진주 지수면의 구재서(具再書) 등으로부터 5000원(쌀 220석치)을 모금, 대한민국 임시정부 김구 주석에게 송금하기도 했는데, 구재서는 LG그룹 창업자 고 구인회의 아버지다.
선생은 1941년 4월 고성군 개천면에서 진주의 강대창(姜大昌), 창원의 변상태(卞相泰) 등 19명과 고려구국동지회를 조직해 활동하던 중 광복을 맞아 김구 선생과 더불어 신탁통치 반대와 친일파 청산을 위해 애쓰다가 고문 후유증으로 1946년 1월 20일 진주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부에선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경상대 영어영문학과 교수·문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