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8일 (목)
전체메뉴

이야기가 있는 공간 (3) 진해 선학곰탕

고스란히 품은 100년의 애환과 흔적

  • 기사입력 : 2017-02-02 22:00:00
  •   
  • 10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난 듯하다. 긴 세월을 견딘 탓인지 지붕은 곳곳이 허물어지고 주저앉기도 했지만, 개보수를 통해 아직은 견딜 만해 보인다.

    아담한 정원에는 오랜 세월 함께한 동백나무와 향나무가 무성한 잎을 자랑하며 버티고 섰다. 예전에는 자그마한 연못이 있어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도 들을 수 있었다는데 지금은 그런 멋스러운 풍경은 찾아 볼 수 없다.

    담벼락의 묵은 때는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듯 까맣게 물들어 있고 앞마당의 매화나무는 잎을 모두 버린 채 추운 겨울을 앙상한 가지로 버티며 따스한 봄 소식이 전해지기를 기다리고 있다.

    창원시 진해구 중원로 32번길에 있는 일본식 전통가옥 ‘요항부 병원장 관사’는 이렇듯 세월의 나이를 버티며 오랜 세월 우리 곁에서 함께하고 있다. 지난 2005년 9월 등록문화재 제193호로 지정됐으며, 현재 ‘선학(仙鶴)곰탕’이라는 이름으로 제법 이름을 떨치고 있다.

    대중음식점 ‘선학곰탕’을 운영하는 심평윤 (72)씨가 이 집에 들어온 건 1998년쯤이다. 이곳에서 식당을 운영한 지 거의 20년이 된 셈이다. ‘요항부 병원장 관사’는 문서상으로는 1938년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100년이 훨씬 지난 것으로 전해진다.
    메인이미지
    등록문화재 제193호로 등록된 요항부 병원장 관사(선학곰탕). 일본식 가옥 특유의 돌출형 현관 입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이 건물은 진해상공회의소 초대(1956~1973) 회장과 창원상공회의소 2·3·4대(1983~1992) 회장을 지낸 고 이정석 선생이 해방과 동시에 불하받아 창원상공회의소가 설립되기 전까지 거의 35년을 살았던 곳이다.

    이후 인근에서 어렵게 살고 있던 ‘반장 부부’가 들어와 17~18년 살게 되었는데, 당시 쌀과 연탄 등 생필품을 주며 집을 잘 살펴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반장 부부는 이 집에서 자식들을 키워 출가시킨 후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지금의 ‘선학곰탕’이 현재까지 이 가옥을 지키고 있다. 선학곰탕 심 사장은 고 이정석 선생의 장남인 이수창(72) 남광석유판매(주) 회장과 오랜 벗이다. 그래서 임대료 등과 상관없이 이곳에서 생업을 하며 지내고 있다.

    ‘요항부 병원장 관사’는 당시로서는 아주 고급스런 주택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집의 전체적인 구조는 ‘ㄱ’자형의 목조주택으로, 현관은 일본식 가옥의 특징인 돌출형으로 설치돼 있다. 현관 미닫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면 일본 전통양식 주택에서 보던 것처럼 긴 마루가 눈에 들어온다.

    손님을 접대하는 응접공간은 서양식으로, 또 가족들이 거주하는 주거 공간은 전통적인 일식으로 만들어졌다. 비록 식당으로 변모하면서 일부 내부 구조도 바뀐 듯하지만, 일본식 가옥에서 부의 상징처럼 느껴지던 공간인 ‘도코노마(床の間)’는 그대로 남아 있다.

    선학곰탕 심 사장은 “도코노마는 좋아하는 그림과 족자, 꽃꽂이 작품 등을 두는 공간으로, 벽 쪽으로 움푹 패어 있으며, 바닥이 방바닥보다 위로 올라가 있습니다. 그리고 집에 손님이 오면 손님은 도코노마를 등지고 앉고 주인은 그 맞은편에 앉는 것이 관례였습니다”라고 설명한다.

    선학곰탕은 오전 11시가 되면 굳게 닫혔던 녹색대문이 열리고, 오후 2시가 되면 문이 닫힌다. 흔히 주위에서 만날 수 있는 곰탕집 같지만 나름 뼈대 있는 곰탕집이다. 집 앞마당 한편의 가마솥에서 우려낸 곰국은 걸쭉함이 그대로 전해진다. 고기의 육질도 뛰어나 입 안에서 느껴지는 식감이 뛰어나다. ‘바로 이 맛에 선학곰탕을 찾는구나!’하는 생각이 든다.
    메인이미지
    요항부 병원장 관사(선학곰탕) 입구.

    2004년 옛 진해시청이 풍호동 시대를 열기 전 선학곰탕은 손님들로 붐볐으나 지금은 오후 영업은 하지 않을 정도로 확연히 손님이 줄었다. 손님들로 넘치던 방들은 옷방으로 바뀌었고 온기가 넘치던 방안은 냉기가 뻗치는 듯하다.

    일식 기와지붕은 세월의 무게에 변했지만 문짝이나 유리창 등은 그대로다. 집이 조금 기울어지면서 창이 완전히 닫히지 않고, 기와지붕에 빗물이 스며들어 두꺼운 천막으로 덮어 놓았지만, 일본식 전통가옥의 양식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좁고 길게 이어진 복도와 문짝, 그리고 유난히 많은 창, 삐걱거리는 마룻바닥과 족히 80~100년은 된 듯한 2개의 벽시계 등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고물처럼 보이는 벽시계 2대가 아직도 정상적으로 작동되는 것 자체가 신기할 정도다.

    심 사장은 집의 마룻바닥과 창문 유리에 얽힌 재미난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그는 “마룻바닥이 걸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것은 잠을 자던 중 자객이 침범했을 때 신호를 해주는 역할을 했으며, 각 창문유리는 얇으면서도 실하고, 지나는 사람이 창문을 통해 사람의 형태는 알아볼 수 있지만 서로가 누구인지 알 수 없도록 빗살을 넣는 등 지혜로움이 느껴집니다”라고 말한다.

    이날 취재에 자리를 함께한 이수창 회장은 적산가옥에 대한 국가의 허술한 관리체계에 대한 아쉬움을 드러냈다. 이 회장은 “‘요항부 병원장 관사’를 문화재청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만 할 것이 아니라 국가가 나서서 관리를 해야 합니다. 개인은 가옥을 관리하는 부분에 있어 분명히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요.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할 정도로 가치가 있는 가옥이라면 소유주에게 보존을 요구하지 말고 국가가 관심을 갖고 투자를 해야 합니다. 지원이 아니라 유지보수를 해달라는 것이지요!”라고 힘주어 말한다.

    메인이미지
    선학곰탕 현관.


    그러나 적산가옥에 대한 관리가 어려운 것은 대부분이 사유재산이기 때문이다. 재산권 문제를 보완하기 위해서 적산가옥 등의 근대문화유산은 지정문화재가 아닌 등록문화재로 운영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면 재산권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 없기에 이런 어려움이 있는 듯하다.

    메인이미지

    비슷한 사례로 부산 동구 수정동에 가면 일제강점기 때 부산철도청장의 관사로 쓰이던 ‘정란각’이 있다. 이 역시 해방 이후 개인이 구입해 고급 요릿집 등으로 운영됐다. 2007년 7월 등록문화재로 지정이 됐지만 주변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등 도시환경이 바뀌자 2010년 문화재청이 이 건물과 부지를 매입해 일본의 침략과 수탈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2012년 문화유산국민신탁에 가옥의 관리를 맡겼고, 3년여 동안 6억여원의 비용을 들여 시설을 복원·보수한 뒤 ‘문화공감 수정’으로 다시 태어나 대중에게 공개됐다.

    우리들의 삶의 애환이 담긴 ‘선학곰탕(요항부 병원장 관사)’은 이렇듯 소중한 가치를 품고 있다. 선학곰탕을 찾는 많은 이들은 이곳을 다시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 가치와 의미를 되뇌며 세월의 흔적을 이야기하면서….

    글·사진= 이준희 기자 jhlee@knnews.co.kr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이준희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