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bile  |   facebook  |   twitter  |   newsstand  |   PDF신문
2017년 10월 18일 (수)
전체메뉴

[살롱] 일상탐독 (39) 윤분이/컵피

  • 기사입력 : 2017-01-20 14:54:35
  •   
  •  
     1
     인간이 한 권의 책이라면,
     그 책의 행간은 그가 겪어왔던 온갖 고통들로 빼곡히 채워지리라.
     지극한 행복이 아니라 지순한 고통으로.
     나는 늘 '인간'이라는 문제에 대해, 그렇게 생각해왔다.
     
     2
     나는 매일 아침 두 권의 노회한 책을 읽는다.
     오래됐고, 오래됐기에 어딘가 뒤틀려 있고,
     뒤틀려 있기에 난해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책들.

    메인이미지

     3
     호호 불면 입김이 나는 겨울 아침,
     차에 시동을 건 뒤 잠깐 시선을 밖으로 돌리면
     첫 번째 책이 어기적어기적 걸어가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책은 쓰레기 종량제 봉투와 집게와 같은 잡동사니가 잔뜩 실린 낡은 리어카를 끈다.
     
     아침마다 그를 만나기 시작한 건 2년 전부터다.
     그가 매일 아침마다 하는 일은
     아파트 앞 이면도로에 떨어져 있는 갖가지 쓰레기를 줍는 일이다.
     쓰레기는 주워도 주워도 다음날이면 어김없이,
     밉상스런 뾰루지처럼 도로 위에 오소소 돋아났다.
     
     그는 상당히 나이가 들어 보인다.
     뚱뚱하고 주름이 많으며 걸음은 거북처럼 느리다.
     얼굴 한 가운데는 큰 칼자국이 나 있다.
     한쪽 다리를 살짝 절고, 험상궂은 인상에 두 눈만 형형하게 빛난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서 읽어내는 것은
     그런 표피적인 것들 뿐 만은 아니다.
     
     그의 '줍는 행위'는 일종의 구도적 자세와 같다고,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비가 오면 우비를 입고
     바람이 불면 바람막이 점퍼를 여며 입고
     염천에는 땀을 억수같이 흘려가며 쓰레기를 줍는 노인.
     그는 자신을 죽이는 법을 연마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길에서 살아가는 짐승들이 가장 처음 그를 알아봤다.
     복잡하고 화려했을지 모를 과거를 뒤로 하고
     지금은 묵묵히, 스스로 만든 구도의 길을 걷는 이 노쇠한 수행자를.
     
     그가 어기적거리며 끄는 리어카 주변으로는
     늘 검거나 희거나 줄무늬 옷을 입은 길고양이들이 몰렸다.
     가끔은 근본을 모를 개도 섞여 있었다.
     그것들은 그의 천천한 걸음에 보조를 맞춰 걷다가
     가끔은 리어카 위에서 꼬리를 말고 꼬박꼬박 졸기도 했다.
     그는 자신을 따라오는 짐승들과 먹을 것을 나누고 마실 것도 나눴다.
     
     나는 그 모든 것들을 찬찬히 읽어왔다.

    메인이미지


     4
     두 번째 책은 캐딜락을 몬다.
     그의 흰색 캐딜락 CTS는 고급 세단의 명성에 걸맞게 매우 크고 단단해 보인다.
     그것은 마치 한 마리 거대한 코뿔소처럼 양 어깨를 펴고 이면도로 끝에 서 있다.
     그것이 바로, 진주처럼 품어 온 그의 내면과 외양의 전부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나는 매일 아침 하고 있다.
     거두절미 하자면, 두 번째 책은 캐딜락의 노예다.
     
     내가 그를 눈여겨본 것은 1년 전쯤부터다.
     어느 날 출근시간에 웬 캐딜락 한 대가 이면도로의 반 이상을 차지하고
     길을 비켜주지 않아 곤욕을 치른 뒤부터였다.
     
     그는 다소 신간처럼 보이나 역시나 오래된 책이다.
     키가 작고 뚱뚱하며 자라처럼 목이 짧다.
     짧고 굵은 다리에 딱 떨어지는 멜빵바지를 우스꽝스럽게 입고 다닌다.
     남루한 그의 차림은 캐딜락이라는 멋들어진 갑옷을 덧입으며
     그의 인식 속에서 새롭게 태어난 듯 보였다.
     그러므로 차에 오르기 전 그의 표정은
     잘생긴 외아들을 둔 아비의 얼굴처럼
     뿌듯하게 차오르며 확연히 달라진 색으로 빛난다.
     
     그는 매일 아침 곧 허물어질 재개발 구역의
     오래되고 낡은 집에서 나와 캐딜락을 몰고 어디론가 사라진다.
     나에게, 그의 집과 그의 차가 던져주는 관념적 비대칭은 조금 낯설다.
     매일 아침 내가 가는 방향과 그가 가는 방향은 늘 반대여서
     나는 그가 어디로 가는 지 영영 알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의 짧은 목 언저리에서,
     도끼눈을 뜨고 차 주변을 살피는 그의 표독스런 표정에서,
     견고하고 무자비한 그의 자존을 읽는다.
     이스트를 먹인 빵처럼 서서히 부풀어 오른 물욕을 읽는다.
     
     그것이 그의 육체에 깃든 전부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오랫동안 생각해왔다.
     
     5
     지금 나는 집 근처 카페에 혼자 앉아
     매일 아침 만나게 되는 두 사람을 떠올린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앞으로 읽어야 할 책이 많을 것이다.
     달고 뜨거운 차가 조금씩 식고있다.
     나는 그것을 서둘러 마신다.
     써야할 고통도 그만큼 많을 것이다.
     

    메인이미지

     '컵피 한 잔을 태워 녹고
     않저면 내 마음이 허뭇하네

     그 컵피 향기가 날을 유혹하네
     나는 그 향기에 빠져들어
     컵피를 내 잎술에 다가오면
     난 그 컵피에 내 잎술을 대어
     마구 빨아버리래
     빨다 보면 컵피 잎술이 다 달아지고
     내 잎술만 혼자 남내'
     
     '컵피'-삶창/강금연 외 88명/'시가 뭐고?' 80페이지
     
     
     이 시는 어느 카페에서 사람을 기다리다 무심코 읽게 된 작고 얇은 책 한 권에 발견한 시다. 경상북도 칠곡군에서 진행한 인문학도시 조성사업을 통해 문해(文解) 교육으로 한글을 처음 익힌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손수 쓴 시들을 모아 엮은 시집이었다. 만약 누군가에게 난생 처음 시를 써보라는 과제가 주어진다면, 그 사람이 내놓은 가장 처음의 글이야말로 바로 그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로 채워져 있지 않겠는가, 그것이 시를 바라보는 나의 관점이다. 왜 나이 많은 어르신들은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는가. '내가 겪은 거 책으로 쓸라치모 몇 권은 될기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언가를 쓰거나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글이 아닌 그들 자체를 읽는데 능숙해져 간다. 눈치껏 잘 읽어내는 것, 그것은 어쩌면 어른이 된다는 말과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한 권의 책이며 한 편의 시이다. 그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었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
  • 김유경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