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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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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26) 황정은/복경

  • 기사입력 : 2017-01-06 14:2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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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자를 처음 본 건…
     10월 말에서 11월 초순 사이였을 것으로 기억된다.
     탐욕스럽게 두 눈을 희번덕이는 많은 여자들 사이에서였다.
     여자는 제대로 먹지 못해 발육이 늦은 불우한 여고생처럼 왜소한 몸으로,
     뿌리가 하얗게 샌 머리를 한 가닥으로 질끈 묶고 서 있었다.
     화장을 한 것인지 안 한 것인지, 창백한 얼굴 가운데 입술만 빨갰다.
     
     겨울외투에 어울리는 산뜻한 스카프를 사러 그곳에 갔었다.
     때문에 바탕은 어둡게, 그 위에 새겨질 문양의 색은 밝게,
     이왕이면 차르르, 한 마리 아름다운 실뱀처럼 미끄러져 내리는 질감으로.
     그런 것들을 생각하며 그곳에 차를 몰아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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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는 가판대 뒤에서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서 있었다.
     처음엔 거기에 사람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그녀는, 지나치게 조용하고 고요하게 존재하고 있었다.
     아무렇게나 뒤지고, 함부로 물건을 올려놓고, 이걸 달라 저걸 달라 요구해대는
     늙거나 젊거나 뚱뚱하거나 마르거나 촌스럽거나 세련된 여자들 사이에서.
     
     양처럼 유순해 보였고 소처럼 슬픈 눈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마모되지 않은 채로, 있는 듯 없는 듯 살아야 할 사람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렇게 살아야 할 사람인데, 무엇이 그녀를 거기로 내몰았을까, 하는 생각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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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내 속에 뒤섞여 있는 실질과 허황을 비교적 명확하게 진단하는 편이었고
     나의 구매력과, 구매를?통한 실익 사이에서 대체로 타협을 잘 보는 편이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한 장의 실크 스카프였다.
     검은 바탕에 무엇이라 딱히 꼬집어 표현하기 어려운 기하학적 패턴이 새겨진.
     
     나는 가만히 서서 가판대를 바라보았다.
     가만히 서서 자그마한 천 조각들의 효능과 가격을 저울질하고 있었다.
     잠시 후, 여자는 가판대에 빼곡이 들어찬 수 백 장의 스카프 사이에서
     내 검지가 가리킨 한 장을 빼내어 내 목에 둘러주고 있었다.
     '고객님. 이렇게 매셔도 되고 이렇게 매셔도 되요. 차분한 색감이라 자주 쓰실 거예요.'
     그러면서 그녀는 그것을 곱게 접어 굵은 매듭을 지어 보였다가,
     넥타이처럼 길게 아래로 늘어뜨려 끝에 살짝 리본을 묶는 스타일링을 선보였다.
     그리고 싱긋 웃었다.
     목소리는 작았고 옅은 눈매는 아래로 처져 선해 보였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스카프가 형성해 놓은 나의 색다른 분위기를 감상했다.
     측면으로 서서 곁눈질도 해보고, 내가 가진 코트나 셔츠들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거울 너머로, 눈치를 살피며 서 있는 그녀의 어색한 표정이 보였다.
     나는 그날 그것을 샀다.
     마음에 들어 그것을 샀던가. 글쎄.
     사실 사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말았다는 게 더 옳을 것이다.
     적어도 나 하나만이라도 그녀를 주눅 들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하루 종일 천 조각을 펴고 접는 무감각의 세계에서 그녀를 구출해야겠다는 생각.
     사실 그런 일방적이고도 허무맹랑한 측은지심이 나를 압도했었다.
     
     벌떼처럼 들이닥친 여자들은 스카프 한 장을 앞에 두고
     조금 더 아름다워지겠다는 생생한 욕망을 날 것 그대로 가감없이 표출했다.
     여자들의 행동은 '대접 받을' 권리를 등에 업었기에,
     조금은 무례하고, 조금은 당당하게 보였다.
     여자들은 티슈를 뽑듯 스카프를 제멋대로 꺼내어 두르고 거울 앞을 서성대다가
     같이 온 여자들에게 새된 소리로 되묻곤 했다.
     예쁘냐, 안 예쁘냐, 이건 별로냐, 저건 어떠냐, 다른 집도 가보자…
     그런 이야기들을 잘도 해가며.
     
     흔하디흔한 풍경이었는데, 심지어 내가 늘 하고 있던 행동들이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도 그 장면이 낯설고 두려웠다.
     여자는 바싹 마른 갈대처럼 휘둘리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들의 욕망에, 여자들의 구매력에, 여자들의 표독스러움에.
     여자는 고객들을 재빠르게 응대하지 못하는 듯 보였고
     허둥대다가 카드나 전표를 바닥에 자주 흘렸다.
     
     12월 중순.
     나는 다시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는 변함없는 모습으로 두 손을 모으고 서 있었다.
     나는 그날 그녀에게서 여우 목도리 하나와 캐시미어 목도리 하나를 샀다.
     계획에 없었던 것들이었지만 사고 말았다.
     당연히 그녀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녀는 쇼핑백을 들고 뒤돌아서는 나를 향해
     90도 가까이 허리를 숙여 두 번이나 꾸벅 꾸벅 인사를 했다.
     '고객님. 예쁘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나는 지금 그녀의 휑하던 목을 떠올린다.
     그녀도 어딘가에서 목에 두를 도톰하고 부드러운 것을 구매할 것이다.
     이것저것 고르고 따져가면서,
     재질과 색감과 가격을 매섭게 가늠해 가면서,
     고객님, 예쁘게 하세요, 감사합니다, 하는 말도 들어가면서.
     
     그리고 언젠가 여자를 깡그리 잊겠지.
     그리고는 어느 곳 어느 때에, 젊거나 늙거나 뚱뚱하거나 마르거나 촌스럽거나 세련된 모습으로
     이게 예쁘냐, 저게 어울리냐, 다른 곳도 가보자, 이런 새된 소리를 지르고 있을 것이다.
     스카프 따위를 목에 두르고서.
     
     정말이지 그런 일들은, 쉽게 장담할 수 없는 것들이다.
     
     


     '별의별 상황에서 별의별 사람을 겪습니다. 특별하게 지독한 경우엔 공손하게 모은 손으로 아랫배를 꾹 누른 뒤 내가 방금 스위치를 눌렀다고 생각합니다. 그 간단한 조치로 뭔가, 인간 아닌 것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됩니다. 뭔지 모르게 인간 아닌 것이 소리를 내고 있다, 라고 생각해야 흉측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웃으며 제대로 서 있을 수 있습니다. 내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고객과의 관계를 인격적 관계라고 착각해봤자 실수하고 울게 되는 것은 나. 뿐입니다. 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가르쳐준 사람이 매니저로, 이 사람은 이 분야의 최고입니다. 오늘이라도 우리 매장을 방문해준다면 그녀를 볼 수 있을 텐데요. 예쁘게 나이를 먹은 얼굴에 차림새도 응대도 세련된 사람. 그녀가 매니저로 일하는 매장은 가장 먼저 목표 매출액을 달성합니다. 전국의 침구류 매장에서 그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매니저가 손님을 응대할 때는 옆 매장의 매니저들이 복도로 나와 구경합니다. 실제로 보고 배워 말투까지 따라하는 사람도 있으니까. 나도 그녀에게서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도게자土下座라는 것을 가르쳐준 사람도 그녀입니다.
     
     이따금 매니저는 립스틱을 새로 바르고 백화점 근처 지하상가로 내려갑니다. 내려가서 그녀가 무엇을 하느냐면… 구매합니다. 저렴한 스커트나 양말 같은 것을 계산대에 쌓아두고 그 매장에서 일하는 사람을 갈굽니다. 최고, 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 있게 웃을 줄 아는 그녀가 조금의 미소도 없이 매장 직원을 세워두고 질문이나 트집으로 몰아붙이고 까다롭게 굴면서, 그들이 애먹는 모습을 관찰하는 것입니다. 노골적으로 사람을 무시하는 그 태도는 그녀와 내가 매장에서 겪는 고객들 가운데 가장 유난하고 잔혹하게 구는 사람들과도 꼭 닮아서, 지켜보는 내가 조마조마하고 민망할 정도입니다. 왜 그렇게 하느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왜 그 사람들처럼 해요. 그게 어떤지 언니도 알면서. 그러자 그녀는 내게 반문했습니다. 도게자라고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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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게자. 이렇게, 인간이 인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자세를 도게자라고 해. 사람들은 이걸 사과하는 자세라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사과하는 자세가 아니야. 이게 뭐냐, 그 자체야. 이 자세가 보여주는 그 자체. 우리 매장에서 난리치는 사람들, 그 사람들?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야. 사과가 필요하다면 죄송합니다 고객님,으로 충분하잖아? 그런데 그렇게 해도 만족하지 않지. 더 난리지. 실은 이게 필요하니까. 필요하고 바라는 것은 이 자세 자체야. 모두 이것을 바란다. 꿇으라면 꿇는 존재가 있는 세계. 압도적인 우위로 인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경험. 모두가 이것을 바라니까 이것은 필요해 모두에게. 그러니까 나한테도 그게 필요해. 그게 왜 나빠?'- 문학동네/황정은/'아무도 아닌'中 '복경' 203페이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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