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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02월 21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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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36)김소연/이별하는 사람처럼

  • 기사입력 : 2016-12-23 14: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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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부터 결혼하자 덤비던 남자가 있었다.
     
     차를 마시자 해서 마셨더니 밥을 먹자고 했다.
     밥을 먹었더니 술을 마시자 했다.
     술을 마셨더니 술도 깰 겸 좀 걷자고 했고
     걷기 시작하자 불쑥 결혼 이야기를 꺼냈다.
     결혼을 전제로 만나고 싶어요.
     결혼 시기는 내년 봄쯤이 좋겠다고도 했다.
     그게 모두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주면 받고, 끌면 끌리고, 떠밀면 떠밀리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는 적어도 내 눈에는, 상당히 직관적이고 과단성이 풍부한 남자로 보였다.
     이렇게 흘러가는 거구나.
     나는 두 손을 주머니에 깊숙이 찔러넣고
     운명의 주사위가 어떻게 굴러가나
     운명의 나침반이 어디를 가리키나
     그저 구경이나 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그가 하자는 대로 다 했다.
     고기를 먹으러 가자면 잘도 따라갔고
     영화를 보자면 얌전히 앉아서 봤고
     슬그머니 손을 잡으면 잡힌 채로 멍하니 있었고
     향수를 사주면 고맙다며 받아서 뿌리고 다녔다.
     서른이 넘어가면서,
     인생이야 말로 내가 끌면 끌리고 떠밀면 떠밀리는 그런 게 아니란 걸,
     조금씩 알아가고 있었으니까.
     
     남자는 내 이 작은 입 속에 부드러운 혀처럼 구는 면이 있었다.
     그는 오묘하고도 난잡한 나의 정신세계를 이해하려 애썼고
     내가 불쑥 권하는 시집들을 마치 시험을 앞 둔 학생처럼 열심히 읽었으며
     내 앞에 놓인 복잡한 사안들을 자로 재듯 딱딱 잘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는 남자였다.
     
     그가 구애를 했으니 당연한 것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그가 청원을 했으니 지당한 것이라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돌이켜보자면 그렇다는 얘기다.
     그땐 그냥 속이 썩어가는 기분이었으니까.
     봄꽃이 만개해도 그게 꽃인지 잎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메말라 있었으니까.
     
     헤어지자고 말할 때도 그는 참으로 과단성 있게 굴었다.
     관계가 더 깊어지면 상처가 클 것 같아.
     그는 이 말을 휴대전화 문자로 남기고 내 인생에서 깨끗이 사라졌다.
     많은 설명들이 있었지만 사실 관계의 마지막에는 첨언 같은 건 딱히 필요치 않았다.
     이별도 몇 번 해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구석이 있지 않은가.
     그래서 깨끗이 보내줬다.
     
     하지만 얼마간은 불쑥불쑥 속에서 뭔가가 올라왔던 게 사실이었다.
     그의 직장이 보이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그가 앉아있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상상을 했다.
     여러 사람들과 섞인 공간에서 우연히 스치면 태연히 웃으며 인사를 해볼까 안부를 물어볼까 고민도 했었다.
     내가 노력해볼께, 혹은 함께 노력해보자, 라고 문자를 썼다가 지운 날도 있었다.
     
     그러나 워낙에 그렇지 않은가.
     사랑이 노력한다고 되는 거라면.
     뒷말은 줄이겠다.
     그와의 길지 않은 연애는 내게 꽤나 많은 것들을 남겼고
     진심으로 나도 그에게 유의미한 무엇 하나라도 남긴 여자였길 바랐다.
     우리의 관계는 직관적이었고 과단성 있었고, 마침내는 깔끔했다.
     그래서 좋았다.
     한번쯤은, 좋았다고 말하고 싶었다.

    메인이미지

     
     '이별하는 사람처럼

     할 말을 조용히 입술 안에 가뒀지
     
     비가 왔고
     앙상한 나뭇가지 관절마다
     물방울들이 반짝였지
     크리스마스트리의 오너먼트들처럼
     
     우리는 물방울의 개수를
     끝없이 세고 싶었어
     이만이천스물셋 이만이천스물넷……
     
     나는 조용히 일어나
     처음 해보는 것처럼 수족을 움직여
     찻물을 끓였고
     
     수저를 달그락거리며
     너는 평생 동안 그래온 사람처럼
     오래도록 설탕을 녹였지
     
     해가 조금씩 기울었지
     베란다의 화분들이
     그림자를 조금씩 움직였지
     
     선물처럼 심장에서 무언가를 꺼내니
     내 손바닥엔 까만 돌멩이 하나
     
     답례처럼 무언가를 허파에서 꺼내니
     네 손바닥엔 하얀 돌멩이
     하나
     
     이별하는 사람처럼 우리는
     뚱한 돌멩이가 되었지'
     
     '이별하는 사람처럼' - 문학과지성사/김소연/'수학자의 아침' 78페이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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