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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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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24)윤동주/별 헤는 밤

  • 기사입력 : 2016-12-05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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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은 친구 S의 이야기를 한번 해볼까 합니다.
    엄밀히 말하면 S가 홀로 지나와야 했던 어떤 특정한 시기,
    달리 말해 저 같은 철부지는 아직 경험하지 못한 밤에 관한 이야기라고 하면 될까요.

    짐작하건데,
    윤동주 시인에게는 별 헤는 밤이 있었겠죠.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를 떠올려
    아름다운 시를 썼던 밤이 말이죠.

    S에게도 그런 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녀가 헤아렸던 것이 결코 별이라고는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S에게 그 밤들은 ‘어서 지나가라, 지나가라’ 주문을 외고 또 외던 고난의 밤에 가까웠거든요.

    그렇다면 S가 헤아렸던 건 뭘까요?
    그녀가 어두컴컴한 방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하나. 둘. 머잖아 다시 하나. 둘. 헤아려야 했던 건
    분명 별이나 달, 구름, 꽃 같은 것은 아니었을 겁니다.

    S는 저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언니입니다.
    이십대 초반에 친구가 된 이후 계속해서 인연을 이어오고 있죠.
    그녀는 작년에 결혼을 했습니다.
    어느 날 느닷없이 소개시키고 싶은 사람이 있다며
    저녁을 먹기로 한 패밀리 레스토랑에 왠 키 큰 남자를 데리고 나왔더랬죠.
    뿔테 안경에 웃는 얼굴이 선해보이던 그 남자가 형부가 될 줄 짐작이나 했나요.
    게다가 돌아오는 봄에 급작스레 결혼식을 올리리라고는,
    숨 돌릴 틈도 없이 S의 몸에 새 생명이 들어서리라고는 더더욱 짐작이나 했을까요.

    블로그를 검색해 맛집 찾아가기를 즐기던,
    걸릴 것 없는 한마리 새처럼 자유롭던 S는
    어느 날 갑자기 누군가의 아내, 엄마, 며느리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한 남자를 맞이하면서 거의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어야 할 숙명적 지위들이었지만
    S는 사실 그 무게에 힘겨워하는 부분들이 있었어요.
    갑자기 엄마가 된 일 또한 다르지 않았습니다.

    딸이 태어나자 S의 삶은 급격히 달라졌습니다.
    당장 아이를 봐줄 사람을 구해야 했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육아휴직을 내면서 상사의 따가운 눈총을 온몸으로 받아내야 했고
    수술한 부위는 마치 누가 불을 지른 것처럼 홧홧 거렸죠.
    말이 통할 리 없는 아이는 시도때도 없이 울며 보챘고
    깨끗하던 집은 온갖 물건이 흩어져 아수라장이 되기 시작했습니다.
    남편이 도와주는 데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남편도 남편대로 직장에서 매일 전쟁을 치러야 했고, 저녁이면 지친 몸과 마음으로 돌아오곤 했거든요.
    그건 제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발견했던 그의 선한 웃음과는 또다른 별개의 문제였죠.
    두 사람은 신경이 날카로워질 대로 날카로워져 말싸움을 하는 날이 잦아졌습니다.
    그 싸움의 끝에서 S는 ‘사랑’이나 ‘행복’ 같은, 보편적이라 생각해왔던 가치들을 의심할 때도 있었습니다.
    딱히 누구의 탓도 아닌, 근본적으로 잘잘못을 따지기 어려운 그런 서글픈 다툼이었죠.

    바로 그런 밤에, 그런 새벽에,
    S는 보채는 딸에게 젖병을 물린 채 우두커니 앉아
    ‘별 헤는 밤’을 읽었다고 했습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아이가 징징거리면 요람을 흔들듯 상반신을 가볍게 좌우로 흔들며
    때로는 아이가 떼를 쓰고 울면 S도 덩달아 엉엉 울면서
    그 시를 다시, 또 다시 읽었다고 했습니다.

    그 시는 은행에서 사은품으로 나눠준 머그컵에 아로새겨져 있었다고해요.
    이 세상에 널리고 널린 수많은 컵, 흐르는 물에 씻어 무심코 엎어두던, 흔하디 흔한 컵이었죠.
    정신없이 살다보니 물을 마시고 미처 치우지 못한 머그컵이 몇날며칠을 침대 머리맡에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거기에 익숙하지만 낯설기도 한 시 한 수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고 하더군요.

    어느 날 밤부터 그녀는 그 글을 읽고 또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손엔 아이를 안고 한 손엔 젖병을 들고 말이죠.
    그때부터 머그컵은 S만이 알아볼 수 있는 어떤 운율을 띄기 시작합니다.
    이제 침대 머리맡은 사은품으로 받아온 머그컵, 아니, 시의 고정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고되고 힘든 시기를 무사히 넘기기 위해서 S에겐 뭔가가 필요했고,
    필사적이었던 매 순간 순간마다 그녀를 위로했던 것은
    그 무엇도 아닌 머그컵에 새겨진 시구들이었습니다.
    그 시가 바로 ‘별 헤는 밤’이었다나요.

    그렇습니다.
    ‘별 헤는 밤’은 한낮에는 침대 맡에 고이 잠들어 있다
    지친 남편이 잠들고, 보채던 아이도 깜빡 잠이 든 순간,
    희미하게 켜진 스탠드 불빛아래 깨어나 홀로 남겨진 S를 위로했습니다.
    한 젊은시인이 타국에서 고뇌에 차 지새운 밤들과,
    엄마가 된 한 여인이 지샌 밤들은 그렇게 먼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만나게 됩니다.

    S의 딸은 이제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잘 웃고,
    곧 걸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이 자랐습니다.
    뭐든지 제 손으로 잡아보고 맛보고 움직여 보고 싶어
    장난기 가득한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죠.
    요즘 S는 그런 딸과 매일 씨름을 하고 있습니다.
    이유식으로 장난을 치는 바람에 옷을 다 버린 딸을 씻겨 새 옷을 갈아입히면서,
    S는 제게 ‘별 헤는 밤’에 대해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때 저는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시심(詩心)이라는 건
    애초에 가지고 태어나는 천성이거나 학습으로 만들어지는 능력이 아니라
    삶의 한 순간, 아릿한 어떤 부분을 날카롭게 파고드는 섬광 같은 게 아닐까하고요.
    우리가 시를 선택한다기 보단, 시가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아닐까하고요.
    S가 아이를 달래며 지샌 밤, 수차례 헤아렸던 건 바로 그것이 아닐까하고요.

    메인이미지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는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 마디씩 불러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잼’,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 윤동주/별 헤는 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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