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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33) 유희경/한편

  • 기사입력 : 2016-11-17 15:0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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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말을 작정하고 마음에 새긴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말은 지난해 11월 어느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부터 나와 동행하기 시작했고
     시간을 거듭할수록 스스로 몸집을 불리고 줄이는 자생력을 지니기 시작했다.
     인식의 통제를 벗어나는 일,
     무언가를 상상하게 하는 일,
     말의 힘은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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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피를 마시다 문득 창밖으로 눈을 돌려 분주하게 돌아가는 세상을 엿보거나
     신문에서 생판 모르는 이의 불행한 삶의 단면을 예기치 않게 마주하게 되었을 때,
     공들여 키운 화초가 꽃봉오리를 피어 올리거나 퇴근길 주차장에서 통통한 아기 고양이를 만났을 때,
     그 말은 말랑말랑한 고무공처럼 고분고분 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의 시간동안 그말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뾰족하고 차갑게, 또 모질게 굴었다.
     말을 뱉은 이는 기억조차 못하는 그 한마디가,
     내게는 남은 온 생을 지배하는 저주 같다 느껴졌다면
     누군가가 뺨이나 머리카락에 함부로 뱉은 침 같이 느껴졌다면
     그건 너무 과하게 문학적인 표현일까.
     
     그 말을 버리기까지 1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으므로
     1년 동안 나는 실수로라도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우리는 20대의 한 시절 동안 거의 매일 안부를 물을 만큼 꽤나 가까운 사이였는데도.
     그 말 한 마디 때문에,
     그녀가 크림파스타를 오물거리며 무심코 뱉은,
     '네가 이기적으로 붙잡지만 않았어도, 그는 진작 다른 사람 만나 오붓한 가정을 꾸렸을 거야.'라는 그 말 때문에.
     그 말이 얼마나 크고 단단한 못이 되어 가슴에 와 박혔는지,
     그것을 소화해내기까지 얼마나 자주 온탕과 냉탕을 번갈아 가며 마음의 온도를 제어해야했는지,
     그녀는 몰랐다.
     
     1년 만에 만났지만 우리는 마치 엊그제 만난 사람들처럼 굴었다.
     그녀가 초대했고 나는 응했다.
     그녀는 그날 밤 내게 따뜻한 저녁을 차려주었고, 나는 백화점에 들러 그녀에게 어울릴만한 것을 골랐다.
     그리고 그녀가 뱉았던 말은 온당하다.
     이제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다.
     일찍이 나는 어떤 사람을 멀리 떠나보냈고 그 일은 그 일일뿐이다.
     우리 모두는 한때 동행하고, 또 한때 각자의 길을 갈뿐이다.
     이제는 그 말과도, 지난했던 동행을 멈추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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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녀와 나는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못다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 대부분은 말랑말랑했다.
     그런 소소한 말들에 나는 조금씩 소리내어 웃기도 했다.
     말의 힘은 거기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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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물이 울고 눈은 울지 않는다
     나보다 먼저 소요가 일어났다
     떨고 있다 떠는 것이 있다
     내게 고인 것들이 불쌍하지만,
     어차피 위선 아니면 위악
     용서받을 것이 아니다
     경계가 경계를 경계하고
     숫자를 세는 일은 지겹지 않다
     끝나지 않으면 잃어버린 거지
     그런 건 찾지 않는 게 좋다
     먼 외국의 일은 잊어도 할 수 없다
     힘은 무겁다 이름은 가깝고,
     누구나 너무 자주 생각한다
     세계는 생각의 덩어리진 형태
     생활은 오쟁이 진 모습 그대로
     흑백의 거리가 어둑어둑해진다
     비극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는 결론의 집에서 산다'
     
     '한편' - 문학과지성사/유희경/'오늘 아침 단어'16페이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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