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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32) 조경란/후후후의 숲

  • 기사입력 : 2016-11-08 13:5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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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것은 아주 짧은 이야기예요.
     이것은 또한 볼펜 한 자루에 관한 이야기,
     달리 말하면 밍크코트 한 벌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아, 어쩌면 우리가 가진 모든 것들, 그 부질없는 것들에 관한 이야기가 될 수도 있겠네요.
     
     가을비가 내리던 목요일 오후였어요.
     민주 씨는 문자 메시지를 하나 받습니다.
     '안녕하세요'라는 인사로 시작되는 메시지였죠.
     보낸 이는 천영호.
     그는 민주 씨와 그녀의 남편이 남아프리카로 신혼여행을 갔을 때 가이드를 했던 여행사 사장입니다.
     삼십대 중반이라는 엇비슷한 나이에, 엇비슷한 사회경험과 정치성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그들은 꽤나 가까운 친구가 되었습니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로도 종종 함께 술을 마시고 일상과 덕담을 나눴죠.
     민주 씨 부부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다시 여행을 가려고 적금을 붓고 있기도 했습니다.
     
     마침 민주 씨는 장조림을 만들던 참이었습니다.
     그녀는 메추리알과 우둔살에 양념장을 끼얹어가며 메시지를 끝까지 읽었어요.
     거기에는 이런 말도 안 되는 문장들이 줄줄이 따라 나왔고,
     그것들은 나무주걱을 들고 멍하니 서 있는 민주 씨의 뒤통수를 세게 후려쳤죠.
     '안녕하세요. 부음을 알립니다. 천영호. 세브란스병원 영안실 5호. 발인 21일.'
     
     영호 씨는 여행사 사무실에서 혼자 야근을 하다 뇌출혈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다음날 출근한 직원들이 의자에 앉은 채 뻣뻣하게 굳어있는 영호 씨를 발견했죠.
     옷장에서 검은색 옷을 찾아 입으며 민주 씨는 생각했습니다.
     어린 아이 둘이 있는 서른일곱 가장이 맞이한 갑작스런 죽음에 대해,
     남편의 휴대전화에 저장된 번호에 일일이 부음 메시지를 보내야 했던 영호 씨의 아내에 대해서 말이죠.
     
     현관을 나서려던 민주 씨는 도로 집안으로 들어와 거실 서랍장 맨 아래 칸을 엽니다.
     거기엔 볼펜 한 자루가 든 푸른색 플라스틱 상자가 하나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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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혼여행 마지막 날 밤엔 복층 구조였던 민주 부부의 호텔방에 모여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더랬다.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그날 민주는 천 사장이 존경한다는, 서거한 대통령에게 받은 볼펜 이야기를 자랑삼아 했다. 정확히는 대통령이 아니고 영부인을 만나러 간 자리였고 그 볼펜이 그 날의 기념품이기도 했다. 천 사장은 대통령 사인이 들어간 볼펜을 갖고 있는 민주에게 그날 밤 좋으시겠어요, 정말 좋으시겠어요 소리를 열 번도 더 한 것 같다. 몇 번인가, 쓰지도 않고 이젠 장식용으로도 꺼내놓지 않는 그 볼펜을 천 사장에게 줄까?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다. 그 후로도 종종 천 사장은 그 볼펜 이야기를 꺼내곤 했으니까. 세상에서 민주가 가장 부럽다는 표정으로. 민주는 볼펜 상자를 핸드백에 넣었다. 그러고도 선뜻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너무 커서 딱 한 번 입고 장롱 안쪽에 걸어둔 시금치색 캐시미어 스웨터는 언니가, 주방 그릇장에 한 번도 쓰지 않고 세 장 겹쳐둔 영국제 접시 세트는 결혼을 앞둔 대학 친구가, 유행이 지나 신지도 않는 새것 같은 털부츠는 시댁 아가씨가 갖고 싶어 하는 것들인데. 금방 기억나진 않지만 그런 물건들은 더 많을 것이다. 민주는 둘이 살기엔 좀 넓다 싶은 집 안을 천천히 둘러보곤 검정 구두를 찾아 신었다. 지금은 일단 영안실에 가봐야 할 것 같다. 이미 늦은 선물이 더 늦어지지 않도록.'- 스윙밴드/조경란/'후후후의 숲' 98페이지
     
     이제부턴 볼펜 이야기는 접고 밍크코트 이야기를 한 번 해보겠습니다.
     그 값비싼 밍크코트는 본래 영기 씨의 것입니다.
     그녀가 중년부인 소리를 들을만한 나이에 그녀의 남편이 장만해 준 것이죠.
     게다가 워낙에 멋쟁이인 영기 씨가 '밍크'라는 소재를 비켜갈 리가 있겠습니까.
     코트는 한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적당한 길이로 엉덩이를 살짝 덮고, 클래식한 디자인으로 쉽게 질리지도 않았죠.
     영기 씨는 코트를 아껴 입었습니다.
     막내가 박사학위를 땄을 때, 손자가 학교에 입학 했을 때 등등
     나름대로 영기 씨의 인생에 중요하다 싶은 순간을 함께 했죠.
     
     그렇게 빛나는 영광을 누렸던 밍크코트지만
     영기 씨의 육체적 쇠락 앞에선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영기 씨가 병원을 들락거리기 시작하고 누군가의 부축 없이는 거동조차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밍크코트는 영기 씨의 인생에서 상당히 거추장스러운 존재가 된 듯 보였습니다.
     영기 씨는 이제 두터운 삶보다는 날개처럼 가벼운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거든요.
     때문에 코트를 걸칠 의욕도 기회도, 세월을 따라 흘러가버린 옛 노래가 되어버렸죠.
     하지만 영기 씨가 밍크코트를 어찌하진 않았어요.
     그 비싸고 좋은 걸 어쩔 수 있겠어요.
     장롱에 고이 모셔두는 것 말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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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을 떠나기 전 1년 정도,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느 노인들처럼 영기 씨는 요양병원에 머물렀습니다.
     그리고 집안 여자들이 오며가며 자주 간병을 왔습니다.
     특히 인근에 살고 있는 큰며느리, 딸, 큰손녀가 자주 영기 씨의 수발을 들었습니다.
     여인네들은 영기 씨의 아기같은 말투가 귀여워 이런 우스개 소리를 잘 했었어요.
     큰며느리는 영기 씨에게 죽을 떠먹이며 말했죠.
     '어머님, 밍크코트요. 참 따뜻해 보이던데, 저 주셔요.'
     그럼 영기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그래.'
     막내딸은 영기 씨의 속옷을 갈아입히며 말했습니다.
     '엄마, 밍크코트 담에 내가 가져 갈 거야.'
     그럼 영기 씨는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그래.'
     큰손녀는 영기 씨의 다리를 주무르며 말했어요.
     '할머니, 밍크코트 내 거잖아요. 그죠?'
     그럼 영기 씨는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그래.'
     
     밍크코트는 누구의 것이 되었냐고요?
     글쎄요. 절실히 그것이 필요한 사람 혹은 더욱 약삭빠른 사람, 혹은 영기 씨를 유독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누군가의 것이 되었겠죠.
     어쨌거나 저의 할머니 박영기 씨는 2년 전 따뜻한 봄날 자신이 소유했던 모든 것을 버린 채 세상을 떠났고 그해 겨울은 대단히 추웠던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겨울, 세 여인 중 누가 그 아름다운 코트를 입고 집안 행사에 나타났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군요.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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