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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31) 박서영/돌의 주파수

  • 기사입력 : 2016-10-21 15: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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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짜고짜 이름이 안 좋다고 했다.
     '자식을 보게 되면 아들보다는 딸이랑 인연이 있겠고, 재물운은 나쁘지 않으나…'라는 말을 마친 뒤였다.
     '허어… 어디 가서 물어보면 아가씨 이름 안 좋다는 말 안 하던가?'
     남자는 그렇게 혼잣말도 아니고 묻는 말도 아닌 말을 하더니 입을 쩝쩝 다셨다.
     푸르죽죽한 입술 사이로 누런 앞니가 얼핏 보였다.
     
     '아… 네.'
     당황스러워하는 내 앞에 남자는 곰팡내가 풀풀 풍기는 책자를 하나 들이밀었다.
     철 지난 등산복 차림에 면도도 하지 않은 남자의 궁핍한 행색처럼,
     서향으로 앉아 하루 종일 어두컴컴한, 여기저기 담배 자국이 있는 그 방의 스산한 풍경처럼,
     남자가 애지중지하는 책마저도 여기저기가 헤져 남루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그것을 겨우 한 손에 건네받았으나 펴볼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겉표지의 제목은 심지어 세로쓰기가 되어 있었다.
     
     '아가씨, 내가 지어낸 말을 하는 기 아니고, 그 책에 보면 아가씨 이름이 여자 이름으로는 안 좋다, 이런 말이 나와.'
     '아… 네.'
     '아가씨 이름은 한자로도, 한글 획수로도 별로라. 그게 아주 오래된 책이거든. 내가 외우다시피 읽었다.'
     그때 내 얼굴은 조금 붉어졌던가? 두 손에 진땀이 조금 났던가?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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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는 마른 기침을 에헴, 한 번 하더니 말을 시작했다.
     '여자 이름에 경사 경(慶)자를 잘 안 쓰는데 말이야. 그 글자는 기운이 세거든.
     흠… 설명을 하자면, 아가씨는 보석 같아야 사는 여자다 이 말이다.
     표면을 갈고 닦아서 빛이 나야 스스로 만족하는 여자지.
     출세하고 입신양명하기에는 좋으나 가정생활에서는 남편을 누르려고 하니 소리가 날 밖에.
     그러니 시집가거든 자식한테 정성을 쏟고 아가씨 스스로를 조금 죽이고 살아야 되겠다.
     또… 아가씨 이름에는 고독수가 있는데, 잘 승화시키면 예술 하기에는 좋겠다.
     그런데 예술 같은 거 안 할 거면 사람들이랑 어울려 술도 한잔씩 하고 여기저기 놀러 다니고 그러는 게 좋겠다.
     그렇게 안 하면 그것 때문에 뒤에는 병 난다, 아가씨.'
     
     이번엔 정말로 진땀이 났다.
     처음 만난, 아마도 다시 볼일 없을 어떤 남자가 이름 석 자로 내 운명을 좌우로, 동서로 가르고 있다는 사실.
     그는 나의 태생적 기질과 훗날 내가 꾸릴 가정의 단면, 그 속에 깃든 갈등의 전조까지, 그리고 감염 위험성이 다분한 병력과 그 예방법까지 예언하고 있었다.
     '이름 한 번 바까보는 것도 좋을 거 같은데? 새로운 이름으로, 새로운 기운을 타는 거지.'
     남자는 두 눈을 몇 번 끔뻑이더니 개명(改名)을 말했다.
     눈동자 안쪽이 호수처럼 말갛고 고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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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가 사는 옥탑방의 가파른 계단을 내려오며 어머니는 쌀쌀맞은 목소리로 말했다.
     '성명학(姓名學) 하는 사람인가 보네. 이름 지으라고 별소리를 다 한다. 요새는 여자들도 기운이 좀 있어야지. 시절이 옛날이랑 다르다.'
     
     가끔 그 남자가 사는 건물 앞을 지나게 된다.
     그곳을 지날 때면, 남자가 건네주던 낡은 책의 질감과 곰팡내가 떠오른다.
     그리고 나는, 그가 자신 있게 진단했던 내 먼 미래에 대한 전망도 잊지 않았다.
     나는 입신양명할 것인가,
     나는 남편 위에 군림하며 살 것인가,
     나는 나를 죽이고 아이를 위해 살아갈 것인가,
     나는 예술을 하며 살게 될 것인가,
     그리하여 나는 조금은 행복해질 것인가. 혹은 조금은 불행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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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나는 아직 개명하지 않았다.
     때문에 남자가 말하는 '새로운 기운'이 오지 않은 건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영영 내게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혹은 이미 왔다 간 걸까. 그도 아니면 이미 타고 넘어왔으나 알아채지 못했을 뿐인가.
     모르겠다. 알 수 없다. 그러니 계속 앞으로 더듬어 나가 볼 수밖에.
     오늘도 그렇게 나는,
     내 깊은 안쪽 소용돌이 속에서
     운명이 가리키는 주파수 하나를 찾아 헤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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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지면 사랑과 불안이 손끝에 맺힌다
     돌의 주파수는 침묵의 주파수다
     깊은 안쪽 소용돌이에서 자라는 사랑
     나는 이 돌에서 저 돌에게로 고백을 옮겨 담는 사람
     어둠 속에서
     
     나는 나의 유전자에서
     스스로를 괴롭히는 가시들을 건져내고 있다
     잡음이 많은 심장의 주파수
     입을 벌리면 목젖에 걸린 가시가 어떤 방향을 가리킨다
     새벽 세 시 내 몸은 가장 둥글게 구부러진다
     밖으로 터져 나가지 못한 채 안으로 깊이 떨어지는 숨
     점점 반죽 덩어리가 되어가는 몸
     나는 어느 날 구(球)가 되어
     가장 고독한 주파수 하나 몸 안에 가지게 될 것이다'
     
     '돌의 주파수' - 실천문학사/박서영/'좋은 구름'37페이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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