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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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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재근의 우리땅 순례 (119) 산청 (8) 단성면 겁외사 ~ 단속사지

고즈넉한 돌담 따라 가을로 걸어갈까

  • 기사입력 : 2016-10-11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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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을이 속절없이 깊어간다. 지진과 태풍이 지나가도 들판의 벼는 누렇게 익어 간다. 풍년이 오는 가을은 축제의 계절이다. 10월의 정취를 따라 축제 한 곳을 다녀왔다. 축제가 여기저기 많아지면서 일부 축제는 알맹이가 없는 연례행사가 되고 있다. 동네 시골 5일장 수준보다 못하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축제는 여러 곳에서 열리고 있으나 마음을 담을 곳이 쉽지 않다. 가을날 축제에 갔다가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해외여행을 하다 외국에서 만난 어느 도시의 축제는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1년 내내 준비해 진정한 축제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런 닫힌 마음을 열어주는 행복한 축제를 만나고 싶다. 10월의 아름다운 가을은 산과 들판에 하루가 다르게 색칠을 하고 있다. 우리 땅 발길 닿는 여행길마다 문화와 역사, 진솔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다. 떠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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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의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로 지정된 산청군 남사예담촌의 흙돌담길.

    ▲겁외사·성철스님 기념관

    목면시배유지를 나오니 밭에는 하얀 목화가 탐스런 꽃처럼 달려 있었다. 고려말 문익점 선생은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목화를 보며 추위에 떠는 백성들을 생각했다고 한다. 산청의 농특산물 판매장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주차장에서 대형버스를 타고 온 관광객들이 가스통을 꺼내 국을 끓이며 한바탕 잔치 준비를 하고 있었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도 이런 풍경을 만나는데 위험해 보였다. 고구마를 한 박스 사서 지리산대로 시천면 중산리 방향으로 향했다.

    겁외사 이정표를 보고 성철로를 따라 남강을 가로지르는 묵곡교를 건넜다. 교량 밑으로 유유히 흐르는 물줄기는 근래에 비가 많이 내려 넉넉하게 채워지고 있었다. 체육시설이 있는 묵곡 상촌회관을 지나면 성철스님의 생가 겁외사와 성철스님기념관이 있다. 가장 먼저 발길을 머물게 하는 곳은 주변에 줄지어 있는 노인들의 농산물 노점상이다. 성철스님이 마을 노인들에게 소일거리를 주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철스님의 속명은 이영주이고 1912년 2월 19일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겁외사 자리에서 태어났다. 이미 답사를 여러 차례 했던 해인사 백련암에서 출가를 했고, 1993년 10월 4일 7시 30분 열반에 들었다. 승탑이 현대식으로 제작돼 해인사 입구 승탑전에 있다. 어지럽던 한국불교를 제자리로 돌려놓은 현대 한국불교의 큰 스승이었다. 젊은 시절 사상적으로 방황하며 불경에 이끌려 지리산 대원사에 참배하려고 갔다가 속인은 들어갈 수 없는 탑전에 자리를 깔고 참 수행에 들어갔다.

    해인사 백련암에 머물던 동산스님이 그 이야기를 전해 듣고 사람을 보내 데려왔다. 동산스님은 성철이란 법명을 주면서 머리를 깎였다. 스님은 후일 “우습게 중이 됐어” 라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그때 나이 24살(1935년)이었다. 1981년 조계종 제7대 종정으로 추대되며 설파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법어는 지금도 큰 가르침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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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사예담촌 돌담길.


    즉 ‘고요하면 맑아지고, 맑아지면 밝아지고, 밝아지면 보인다’는 뜻이다. 스님이 출가 전 24년 동안 살았던 생가 터에 2001년 겁외사와 함께 생가가 복원됐다. 입구 누각 현판의 ‘벽해루’의 뜻은 ‘아침의 붉은 해가 푸른 바다를 뚫고 솟아오른다’는 뜻이다. 경내로 들어서면 청동으로 만든 스님의 동상이 있다. 동상 뒤편에 복원된 생가가 있는데 원래의 모습은 아니고 일반적인 가옥 형태이다. 혜근문을 지나면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작은 기념관이 있다. 안채는 해인사 백련암에서 생활할 때의 모습이 재현돼 있다. 사랑채와 기념관에는 누더기 가사를 비롯해 스님이 사용했던 유품이 전시돼 있다.

    스님이 40년 동안 입었다는 한 벌의 누더기 옷은 어디가 원래 천이고 어디가 기워진 누더기 천인지 알 수 없을 정도이다. 누더기가 주는 교훈은 욕심과 탐욕을 버리라고 하는 스님의 회초리 같은 생각이 들었다. 벽해루 건너편에 성철스님기념관이 있다. 스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불자들이 20억원을 모아 2015년 4월 개관했다. 1층은 스님의 흉상이 있는 참배의 공간이고 2층은 휴식 공간이다. 기념관의 설계는 한국의 전통건축과 석굴암을 참고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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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사예담촌 사양정사 전경.


    ▲남사예담촌·단속사지

    가을이 흠뻑 내리는 겁외사를 뒤로하고 다시 남강을 건너 지리산대로를 따라 남사예담촌으로 향했다. 작은 고개를 살짝 넘어 들판을 지나니 실개천이 마을을 반달 모양으로 휘감고 돌아 흐르는 남사마을이다. 2011년 남사마을은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1호 남사예담촌이 됐다. 옛 정취가 남아 있는 기와집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정겹게 흙담을 사이에 두고 들어서 있다. 지금은 현대식 주차장에다 마을 안내판까지 있지만 남사마을과의 인연은 오래됐다. 남사마을은 지리산 등산의 출발지점인 시천면 중산리로 가는 길이라 여러 번 지나갔지만, 그때는 관심도 없었고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34년 전쯤 잔설이 남아 있던 설날 아침 지리산 가는 길에 아름다운 한복을 입은 사람들과 기와집, 물레방앗간을 보고 버스에서 내렸다. 지금은 물레방앗간이 있던 자리는 흔적조차도 없고 주차장 인근에 박제된 장식용으로 변해 있다. 그때는 실제로 물레방아를 돌려 방아를 찧고 있었다. 그런 옛 문화들이 사라져 가는 것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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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속사지 당간지주.


    마을 안길을 따라 아름다운 곡선을 그리며 이어진 담장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마을 촌로가 집으로 초대를 해줘 떡국 대접을 받았던 추억이 있다. 강산이 3번이나 변한다는 세월은 흘러갔지만 아름다운 추억으로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다. 산골마을에 기와집이 즐비한 것도 궁금했지만 흙 담장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고즈넉한 풍경을 간직하고 있었다. 자연에서 얻은 흙과 돌로 쌓아 정감이 가고, 고개를 들면 이웃과 대화를 하고 안부를 물어 단절감을 주지도 않는 소통의 공간이다. 남사마을의 집들은 대부분 20세기 초에 지어진 부농 주택이다.

    여러 성씨가 살면서 서로 과시를 위해 지어진 듯 형태의 과장과 왜곡이 있어 보인다. 마을에서 가장 큰 집은 최재기 가옥으로 1920년 건축했는데 3겹의 사랑채이고 남녀의 생활을 구분했다. 이상옥 가옥은 가장 오래된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의 건립 연대가 200년 정도 차이가 나는데 구조적·조형적 차이를 비교해 보면 한옥의 변천과정을 알 수 있다. 80여년 전에 지은 사양정사는 정면 7칸 옆면 3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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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속사지 삼층석탑.

    중산리 방향으로 가다 호암교에서 단속사지 이정표를 따라 이십리쯤 가면 웅석봉 자락 양지바른 곳에 당간지주와 쌍탑이 보인다. 가을에 길을 가면 다양한 꽃들이 나그네를 반겨준다. 용두고개에 느티나무를 지붕 삼아 작은 정자가 있다. 부근 암벽에 廣濟巖門(광제암문)이라는 최치원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단속사의 동쪽 문’이라는 뜻도 있고 ‘많은 타인을 도와주는 길’ ‘넓게 깨달음을 성취하는 문’이라는 여러 가지 뜻이 있다. 비가 그친 날 카메라를 들고 사진을 찍기 위해 암벽을 오르다 미끄러졌다. 최치원의 글씨를 보려면 미끄러지지 않는 신발을 신어야 한다.

    통일신라 때 승려들은 속옷 한 벌 들어 있는 바랑을 짊어지고 탁발을 하며 뜨거운 여름날에도 길을 걸었을 것이다. 개울을 따라 잠시 걸으면 소나무숲 사이로 당간지주가 수문장처럼 반긴다. 당간지주 뒤편에는 속절없이 흘러간 세월 속에서도 텅빈 절터에서 으뜸이 되는 동·서 삼층석탑 2기가 마주보고 있었다. 삼국통일 이후에 나타나는 쌍탑 가람 형식이 지리산 깊은 골짜기까지 전해지고 있어 경주에서 여기까지 불국토의 실현을 위해 노력을 했을 신라인들의 불심을 헤아려 본다. 단속사지 동·서 삼층석탑은 비례와 균형의 안정감이 여느 탑에 뒤지지 않는다. 단단한 화강석을 오직 망치와 정으로 다듬은 수법이 단아하여 느낌을 더 보태고 빼고 할 게 없었다.

    탑 옆 정자에서 마을 노인 6명이 이른 저녁식사를 하며 필자를 불렀다. 식사를 하던 한 분(80)이 단속사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나 진위 여부를 가리기가 쉽지 않아 기록은 미뤄둔다. 당간지주는 조선 선조(1567) 때 지방 유생들에 의해 파괴된 것을 1984년 5월 부러진 곳을 시멘트로 복원했다. 이른 저녁을 먹고 일어서는데 정자에 벽시계가 없었다. 밥값이라도 할 생각으로 못을 박아 놓으면 시계를 걸어 주겠다고 하고 왔다. 지난 주말 단속사지 운리마을 정자에 벽시계를 걸어 주고 왔다.

    심재근 (마산대학교입학부처장·옛그늘문화유산답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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