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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28) 진은영/그 머나먼

  • 기사입력 : 2016-08-26 16: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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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는 중견 예술가다.
     나는 그를 몇 년째 알고 지내고 있다.
     나는 그의 예술세계를 이해하고 그는 나의 글을 높이 산다.
     그는 내게 군더더기 없이 신사적이고 나 또한 그를 예술가로서 깎듯이 존중해왔다.
     우리는 가끔 식사를 하고 차를 마신다.
     그는 예술 활동의 어려움과 기쁨, 지난함에 대해 이야기하고 나는 조용히 귀 기울여 듣는다.
     그와 나는 철저히 개인 대 개인으로, 정서적으로 교류한다.

    메인이미지

     
     그러던 어느 날 식사자리에서,
     K는 조금 쓸쓸한 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며 이렇게 말했다.
     아내에 대한 이야기였다.
     '아내는 나와 잘 맞는 사람이죠. 큰 갈등 없이 살았고, 아이들도 건강하게 잘 키웠고 부모님도 극진히 모셨지요.'
     나는 그의 아내를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
     낯빛이 곱고 여성스러운 자태가 인상적인 분이었다.
     그가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살면서 외롭다 느낄 때가 많았죠. 아내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죠. 아내는 나와 생활을 하는 사람이지 예술을 논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가 아내에게 느끼는 거리감은, 이를테면 이런 것이었다.
     그가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면 아내는 그것이 돈이 될 것인가 말 것인가에 관심이 많았다.
     그가 가진 의도나 기법, 새로운 시도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결혼생활에 있어서만큼은 그리 중요한 덕목은 아니었다.
     때문에 아내는 괜찮다 혹은 별로다, 오로지 이 두 가지 표현으로 그의 작품을 명작과 졸작으로 판별했다.
     
     물론 '예술가 K'는 '생활인 아내'에게 조금씩 상처를 받았다.
     그는 아내가 자신의 정신세계를 이해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K는 적어도 그쪽 방면으로는, 아내에게 마음의 문을 닫은 지 오래였다.
     
     담배를 모두 태운 K가 말했다.
     '그렇다고 우리 관계를 비관적으로 보진 않아요. 우리는 정말 좋은 부부로 기억될 겁니다. 나는 결혼생활에서 적어도 어떤 부분은 이미 확실히 터득해버렸으니까.'
     나는 그게 뭐냐고 물었다.
     그 깨우침을, 내게도 조금만 나눠달라고 부탁했다.
     '그건… 아내가 조금 멀리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살면서 늘, 나로부터 좀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멀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
     
     말을 마친 K가 재떨이에 담배를 꾹꾹 눌러 끄는 동안
     나는 그의 말을,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내가 제대로 이해한 것이 맞길 바라며
     어느 시인의 시집에서 스치듯 읽었던 어떤 시 한 수를 떠올리고 있었다.
     
     
     '홍대 앞보다 마레 지구가 좋았다
     내 동생 희영이보다 앨리스가 좋았다
     철수보다 폴이 좋았다
     국어사전보다 세계대백과가 좋다
     아가씨들의 향수보다 당나라 벼루에 갈린 먹 냄새가 좋다
     과학자의 천왕성보다 시인들의 달이 좋다
     
     멀리 있으니까 여기에서
     
     김 뿌린 센베이 과자보다 노란 마카롱이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가족에게서, 어린 날 저녁 매질에서
     
     엘뤼아르보다 박노해가 좋았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상처들에서
     
     연필보다 망치가 좋다, 지우개보다 십자나사못
     성경보다 불경이 좋다
     소녀들이 노인보다 좋다
     
     더 멀리 있으니까
     
     나의 책상에서
     분노에게서
     나에게서
     
     너의 노래가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기쁨에서, 침묵에서, 노래에게서
     
     혁명이 철학이 좋았다
     멀리 있으니까
     
     집에서, 깃털 구름에게서, 심장 속 검은 돌에게서'
     
     '그 머나먼'- 창비/진은영/'훔쳐가는 노래' 37쪽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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