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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24) 하인리히 뵐/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기사입력 : 2016-07-11 19: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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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이 글은 지역 언론계에 대한 내부고발이자,
    지나간 내 과오에 대한 고해성사임을 밝힌다.
     
    2.
    지난달 중순, 조금 이른 휴가를 다녀왔다.
    물리적으로 멀리 떠나 있었고, 심정적으로도 떠나 있고 싶었으므로
    휴대전화는 철저하게 꺼뒀다.
    그것이 화근이었는지 모른다.
    아니, 불씨는 아니었으나 불쏘시개였을지 모르겠다.
    나를 아끼는 회사 선배들과 타언론사 기자들은 번갈아 전화를 넣었을 것이다.
    문자 메시지도 여러 번 보내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응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나도 모르는 사이, 나에 대한 루머는 지역 언론계에 일파만파로 퍼져나갔다.
    소명해야할 장본인의 행방이 묘연했으니,
    하루이틀 사이 '그럴 수도 있다'는 추측은 '그렇다'라는 확신이 되어 드라마틱하게 흘러갔다.
    나는 그 사실을 휴가 마지막 날 저녁, 휴대전화의 전원을 켜고 알았다.
     
    3.
    황당했을 따름이다.
    피식 웃음이 나왔을 뿐이다.
    내가 속한 조직과 사회, 종국적으로 '나'라는 인간에 대한 조소라고 해야할까.
    진위 확인이 불가능한 상황이 그들의 가벼운 입놀림을 부추겼을 것이다.
    커피를 마시며, 혹은 담배를 물고, 퇴근 후 소주잔을 기울이며
    의혹에 찬 눈으로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 얘기 들었어? 유경이가…'
    '그거 아냐? 김 기자가…'
    '정말인가요? 김유경 기자가…'
     
    4.
    나또한 그러했으리라.
    늘 그러한 방식으로 살아왔으리라.
    사건의 전모를 살피는 일은 딱히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리라.
    무언가를 사실로 인식하고, 지금 여기 말하고 있는 순간, 그것이 전부였으리라.
    그리하여 나는 지난 30여년 동안 시시때때로 얄팍한 입술을 달싹이며
    옆 사람의 귀에 음흉하게 속삭였으리라.
    '혹시… 그 얘기 들었어요?'
     
    5.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1974년 2월 20일부터 24일까지 닷새간의 이야기를 담고있다.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27살 독일 여성 카타리다 블룸이 강도 용의자와 사랑에 빠지면서 언론의 그물망에 걸려드는 과정을 그렸다.
    카타리나는 경찰조사 과정에 언론에 무자비하게 노출됐고, 잔인한 강도의 도피를 도운 추악한 여자로 판명된다.
    한 개인의 명예는 무참하게 짓밟히고, 사건의 본질은 흐려지고, 언론은 그녀를 호도한다.
    위기에 몰린 카타리나는 실추된 명예를 되찾고자 애를 쓰다 급기야 기자를 살해하고 만다.
    흥미롭게도 이 소설은 이미 도입부분에서 서사의 결말인 살인사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때문에 소설은 조사자료와 증인의 진술을 토대로 살인사건을 재구성하는 보고서 형식을 띄고 있다.
    '왜 카타리나는 기자를 살해할 수 밖에 없었는가?'라는 이 소설의 화두 속에서,
    진실의 왜곡과 그에 폭발적으로 호응하는 군중심리가 한몸처럼 결합한다.
     
    6.
    다행히 이제 나는 태풍의 눈에서 조금 비껴나있다.
    시간이 흐르면 자연히 진실이 전면에 드러나게 된다는, 그런 진부한 말은 하지 않겠다.
    다만 나는 이 일련의 과정을 통해,
    이전보다는 훨씬 균형잡힌 시각으로 우리가 가진 결함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이 결함은 나같은 보잘것 없는 한 개인으로부터 지역, 더 나아가 이 나라 전체를
    진실과 상관없는 엉뚱한 방향으로 이끌고 잘못된 형태로 왜곡하고 있을 것이다.
    하인리히 뵐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쓰고 이렇게 말했다.
    '우리 눈에 비치는 현실이 폐허라면, 그것을 냉철히 응시하고 묘사하는 것이 작가의 의무다.'
    나는 지금 여기에서, 뵐이 지칭한 '작가'를 '기자'로 바꾸어 발음해보려고 한다.
    나에 관한 이야기를 옮기고 부풀리고 방관했던 모두가 기자였고,
    지난 시간동안 많은 것들을 함부로 치부하고 호도한 나 또한 기자이므로.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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