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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21) 이언 매큐언/체실 비치에서

  • 기사입력 : 2016-04-08 14: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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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는 체실 비치(Chesil Beach)라고 불리는, 영국 도싯 주(州)에 있는 아름다운 해변입니다. 자잘한 자갈이 깔린 길이 해변을 따라 시원하게 나 있는, 영불해협이 내다보이는 해안이지요. 1960년 7월의 어느 날, 바로 이 체실 비치에서 이야기는 시작되고 또 끝이 납니다. 네. 맞아요. 이 이야기는 단 하룻밤 사이의 이야기, 그러나 두 사람의 평생이 담긴 짧고도 긴 이야기 입니다. 주인공은 젊은 남녀, 그것도 오늘 오후에 막 결혼식을 올리고 체실 비치로 신혼여행을 온 신혼부부입니다. 신랑의 이름은 에드워드 메이휴, 대학에서 역사학을 전공했고,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짤막한 전기 시리즈를 써서 출판하는 것을 꿈으로 가진 건실한 청년이죠. 그는 곧 장인이 경영하는 회사에 들어가 일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신부의 이름은 플로렌스 폰팅, 바이올린을 전공했고, 단단한 골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육체적 위엄과 음악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갖춘 매력적인 아가씨죠. 현재는 음대 학생들로 이루어진 에니머스 사중주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활동하며 데뷔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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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은 1년 전인 1959년 여름 런던 중심부인 트라팔가 광장에서 이뤄졌습니다. 에드워드는 자전거를 타고 광장을 배회하고 있었고, 플로렌스 역시 산책을 나온 참이었죠. 마침 광장에는 지역 핵군축 캠페인이 열리고 있었습니다. 무심코 반핵구호가 적힌 팸플릿을 받아 든 두 사람은 팸플릿을 읽다말고 무엇에 홀린듯 앞에 서 있던 서로의 눈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에게 말을 걸지요. 네. 맞아요. 그게 시작이었죠. 그들이 최초로 교환한 단 한번의 시선과 최초로 나눈 단 한 마디 인사 말입니다. 사실 그 속에 그들의 엇갈린 미래와, 이후 그들의 삶을 지배할 끝없는 회한이 이미 내재되어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직 발아하지 않은, 어떤 꽃을 피울지 종잡을 수 없는 작고 까만 씨앗처럼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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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곧 두 사람은 서로를 진실로 사랑하게 됩니다. 플로렌스가 연주회를 할 때마다, 클래식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는 에드워드는 인내심을 갖고 그녀의 연주를 경청합니다. 그녀를 사랑했으니까요. 연주회장의 세번째 줄 중앙 9C 좌석이 에드워드의 고정석이었습니다. 자연히 플로렌스는 연주를 마치지마자 가장 먼저 9C 좌석에 기대에 찬 시선을 던지곤 했습니다. 거기엔 늘 에드워드가 따뜻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지요. 그들은 각자를 반반씩 빼닮은 귀여운 딸을 낳아 플로렌스가 즐겨 착용하는 하얀 머릿띠 씌워주고 함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꿈을 꿉니다. 그들의 꿈은 비바람에도 끄떡없는 단단한 반석 같아 보이기도 했고, 가까이 가면 사라지고 마는 아슴푸레한 신기루 같기도 했습니다. 본래 그렇게 모순적이고 덧 없는 것이잖아요, 사랑의 서약이란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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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자신들이 가지 않았던 길 끝에 진짜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시간이 한참 지나고서야 깨닫게 된 어리석은 연인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은 몰랐습니다. 네. 전혀 몰랐죠. 허나 그건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이 아닐까요. 인생이든, 사랑이든, 그 어떤 것을 통시적으로 보기 위해서는 긴 시간은 필수불가결 하니까요. 때문에 우리는 늘 불빛 하나 없는 어둠 속을 헤매게 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 컴컴한 굴 속을 뛰쳐나와 모든 것을 단박에 깨닫는 날, 우리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거나 너무 오래 기다렸다는 것도 동시에 깨닫게 됩니다. 네. 맞아요. 삶의 템포는 항상 너무 이르거나 너무 늦나 봅니다.

    이제 다시 체실 비치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첫날밤, 바로 오늘을 위해 에드워드는 만반의 준비를 해왔습니다. 그동안 그는 혼전순결을 지키려는 플로렌스의 뜻을 존중해 왔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육체적 욕구를 혼자서 해결해 왔죠. 그러나 플로렌스는 모든 것이 처음입니다. 그녀는 에드워드를 진심으로 사랑하지만, 도저히 그의 육체를 받아들일 수가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동안은 결혼식 이후로 그 과업을 미루어왔지만, 이제 더는 그럴 수도 없어져 버렸습니다. 그녀는 에드워드의 고결한 정신뿐 아니라 젊고 뜨거운 육체까지 온전히 받아들일 의무가 있는 '아내'가 되었으니까요. 플로렌스는 아름다운 체실 비치가 내려다 보이는 조지 왕조풍의 호텔방에서 실로 엄청난 공포와 혐오감에 휩싸입니다. 꾹 참고 에드워드에게 자신의 몸을 맡기려고 시도했지만 도저히 견딜 수가 없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에드워드를 밀쳐내고 자신의 상황에 대해 솔직하고 단호하게 고백합니다. '나는 절대 이 일을 할 수 없을 것 같아. 앞으로도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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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 남자는 단순하지요. 플로렌스의 말에 에드워드는 보호본능이 아닌 굴욕과 분노를 느낍니다. 그에게 플로렌스의 태도는 그가 견지해 온 그녀를 향한 존중과 인내, 사랑을 무참히 짓밟는 무례 같아 보입니다. 호텔을 뛰쳐 나온 두 사람은 새벽이 밝아오는 체실 비치에서 격렬한 말다툼을 벌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사랑하는 연인들의 말다툼은 좋게 말해 유치하고, 나쁘게 말해 졸렬하지요. 그들은 지난 1년간 꾹꾹 눌러 담아왔던 많은 것들을 모두 쏟아냅니다.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양가의 경제력, 미묘하게 어긋나는 취향과 정서, 애써 외면해 왔던 시시콜콜한 서운함과 인격적 결함들… 마지막 말다툼을 끝내고 플로렌스는 에드워드를 떠납니다. 그 역시 그녀를 붙잡지 못하지요. 호텔로 돌아간 플로렌스는 짐을 꾸려 런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곧 간결하지만 깊은 상흔을 남기게 될 이혼절차가 시작됩니다. 그런 와중에도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서로를 무척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헤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네. 맞아요. 이미 활 시위는 당겨졌고, 일은 그렇게 굴러가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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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 년쯤 뒤, 분노는 사그라들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존심 때문에 그녀를 찾아가지도 편지를 쓰지도 못했다. 플로렌스가 다른 누군가와 함께 있을까봐 두려웠고, 그녀에게서 아무 소식이 없자 그렇다는 확신이 들었다. 에드워드는 세월을 정처없이 배회했다. 여러가지 록 페스티벌 운영에 관여했고, 한 건강식품 매장이 햄스테드에서 개업하는 걸 거들었고, 캠든 타운 운하에서 그리 멀지 않은 레코드 가게에서 일했고, 난잡하고 중복되는 연애를 잇달아 했고, 나중에 삼 년 반 동안 자신의 아내가 되었던 한 여자와 프랑스를 여행하다가 그녀와 파리에서 살았다. 그의 삶은 너무 분주해서 신문 읽을 시간도 없었다. 설령 그가 그 시절에 신문을 읽었더라도 예술지면을 펴서 길고 사색적인 연주회 리뷰를 읽었을 리는 만무했을 것이다. 클래식 음악에 대한 그의 줏대 없는 관심은 완전히 식어버렸고 그 대신 그는 로큰롤에 열광했다. 그래서 1968년 칠월 에니머스 사중주단이 위그모어 홀에서 성공적인 데뷔 무대를 가졌다는 소식도 전혀 듣지 못했다. 평론가는 연주 리뷰 끝부분에 리더인 에니머스 사중주단 제1바이올린 주자를 부각시켰다. '폰팅 양은 쾌활하고 온화한 음색, 서정적이고 섬세한 구절법을 선보였는데, 이렇게 표현해도 좋다면, 그녀는 비단 모차르트나 음악뿐만이 아니라 마치 삶 자체와 사랑에 빠진 여인 같았다.' 그리고 설령 에드워드가 이 리뷰를 읽었다 해도, 객석에 불이 켜지고 젊은 연주자들이 열광적인 박수 갈채에 화답하기 위해 일어섰을 때, 제1바이올린 주자가 저절로 세번째 줄 중앙의 9C 좌석으로 향하는 그녀의 시선을 어찌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그는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알 수 없었으리라. 플로렌스 외에는, 아무도.' - 문학동네/이언 매큐언/'체실 비치에서' 193페이지
     
    시간이 흐른 후 에드워드는 플로렌스를 붙잡지 않은 것을 후회합니다. 첫날밤, 체실 비치에서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신랑의 따뜻한 다독거림, '괜찮아. 서두르지 말자.' 혹은 '시간을 갖고 노력해보자.'는 한마디 말뿐이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됩니다. 두 볼이 발그레하고 머리가 벗어진, 풍채 좋은 60대 노인이 된 그는 종종 플로렌스와 거닐던 너도밤나무 산책로를 걸으며 자신이 놓친 진정한 사랑과 완결되지 못한 인생에 대한 회한에 젖습니다. 드디어 그는 길고도 어두운 미망(迷妄)을 통과해 삶을 통찰하기 시작한 것이었죠. 그리고 그 중심에는 '플로렌스 폰팅'이라는, 그의 인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있는 그대로의 그를 온전하게 사랑해주었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쩔 도리가 있나요. 에드워드는, 아니, 우리 모두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거나 너무 오래 기다렸는 걸요. 그렇게 무언가를 붙잡을 기회는 가차없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우리를 떠나가 버린 걸요. 그리고 그 끝에는 아무도 없는, 그 무엇도 돌이킬 수 없는, 기나긴 자갈길이 나 있는 체실 비치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네. 그래요. 그런 것 같습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우리는 그 길을 덤덤히 걸어가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 깊고도 맑은 사색적인 눈을 하고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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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에,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그는 바이올린을 켜는 그 여자를 자신이 그렇게 떠나보냈다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녀에게 필요했던 건 그의 확실한 사랑과, 앞으로 살아갈 날이 더 많으니 서두를 필요가 전혀 없다는 그의 다독거림뿐이었다. 사랑과 인내가, 그가 이 두가지를 동시에 가지고 있기만 했어도, 두 사람 모두를 마지막까지 도왔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그들의 아이들이 태어나서 삶의 기회를 가졌을 것이고, 머리띠를 한 어린 소녀가 그의 사랑스러운 친구가 되었을까. 한 사람의 인생 전체가 그렇게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말이다. 체실 비치에서 그는 큰 소리로 플로렌스를 불러세울 수도 있었고, 그녀의 뒤를 따라갈 수도 있었다. 그는 몰랐다. 아니, 알려고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이제 그를 잃을 거라는 확신에 고통스러워하면서 그에게서 도망쳤을 때, 그때보다 더 그를 사랑한 적도, 아니 더 절망적으로 사랑한 적도 결코 없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그녀에게는 구원의 음성이었을 것이고, 그 소리에 그녀는 뒤를 돌아보았을 거라는 사실을. 대신, 그는 냉정하고 고결한 침묵으로 일관하며 여름의 어스름 속에 선 채, 그녀가 허둥지둥 해변을 떠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힘겹게 자갈밭을 헤쳐나가는 그녀의 발걸음 소리가 작은 파도들이 부서지는 소리에 묻히고, 그녀의 모습이 창백한 여명 속에서 흐릿한 한 점으로 사라져갈 때까지.' - 문학동네/이언 매큐언/'체실 비치에서' 198페이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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