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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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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23) 장치길 서양화가와 걷는 통영 미륵산 전망대길

하늘·땅·바다가 맞닿은 소통의 길

  • 기사입력 : 2016-02-18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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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살아가며 수없이 많은 만남과 헤어짐의 순간을 맞이하지만, 우리는 마주하는 그 순간이 만남과 헤어짐의 알맞은 시기인지 모르며 살아간다. 그리하여 지나간 때와 아직 오지 않은 때를 바라보며 우리는 후회하면서 살아간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만남과 헤어짐도 또 찾아온다. 그때마다 또다시 마주해야 할 선택의 순간을 후회로 바꾸지 않으려 하지만 어김없이 후회의 순간을 맞닥뜨리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살아온 방식을 계속 고수하며 살아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무렇게나 질끈 묶은 머리를 하고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통영 출신의 장치길 작가. 50대 후반인 작가는 20대의 여섯 해를 뺀 50년이 넘는 시간을 통영에만 머무르며 줄기차게 통영을 그리고 미륵산을 오르내렸다.

    그의 작품을 이루는 것은 가까이서 늘 봐왔던 통영의 하늘, 산, 바다, 항구길 등 자연환경인데, 서양화를 그리지만 한국적 정서가 짙게 묻어나 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늘 봐오던 익숙한 대상을 신선하게 표현하는 작가로 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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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치길(왼쪽) 서양화가가 통영 미륵산 정상 바로 앞 나무데크에서 도영진 기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성승건 기자/

    그와 함께 미륵산 정상으로 향하는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는 길. 그의 작품이 품고 있는 통영항과 통영 앞바다 한려수도의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먼 지평선에는 은빛 물결이 떼를 지어 태양을 반사하고 있다. 바다와 산과 하늘이 아우러진 절경에 말을 잇지 못한 채 낮은 숨소리만 조그마한 케이블카 안에 퍼진다. 마주한 그를 보니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듯하지만 그는 유난히도 말수가 적다.

    그도 여태껏 만남과 헤어짐과 또다른 만남을 반복하며 살아오고 있을 것이다. 마음에 품은 이야기가 통영의 아름다움을 담은 작품으로 치환될 때까지 아름답지만은 않은 후회가 담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분명한 건 그를 이끈 선택들이 그의 발 앞에 놓여져 있었을 때마다 그는 그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왔다는 사실. 그의 표정은 먹먹하고 눈빛엔 할 말을 그득 머금은 것 같은데 평지에서 정상으로 발길을 옮기는 데 딱 필요한 말만 밖으로 꺼낸다.

    ‘사연 깊을 것 같은’ 그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꺼내 놓는 잇따른 질문은 우문이 되고, 어느새 우리는 인파를 뚫고 나가며 전망대길을 걷고 있다. 그의 눈빛과 표정은 이런 말을 건넨다. ‘무슨 말이 필요한가요. 모든 것은 때가 되면 그 ‘때’의 의미를 알 수 있는 겁니다. 그게 자연의 섭리예요.’

    1월 중순의 미륵산 정상 부근. 맑고 청명한 날씨다. 케이블카는 쉬지 않고 평지에 있는 사람들을 정상으로 올려 보내고, 반대로 정상에 있는 사람들을 평지로 다시 데리고 가느라 분주하다. 평일 정오 무렵의 정상을 향하는 전망대길에는 절경을 본 벅차오르는 찰나의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는 사람들로 왁자지껄하다.

    작가가 통영 앞바다와 한려수도의 섬들을 화폭에 담기 위해 수백, 수천 번 오른 길에 잠시 멈춰 섰다.

    “작품 속 구도가 여긴가요?”라고 묻자 팔을 끌어 옆으로 몇 발자국 더 이동한다. “여깁니다.” 손가락을 들어 바다를 가리키며 “저기 저 보이는 곳이 북포루, 저쪽은 세병관이에요. 저곳은 통제영, 또 저곳은 매물도…” 눈앞의 풍경과 그림 속의 풍경이 눈에 포개어진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니 비릿한 바다내음이 코끝으로 스며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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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치길 作 ‘통영별곡’


    줄곧 그는 ‘인간과 생물이 살아가는 자연의 이치와 깨달음’을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어한다. 그래서인지 통영의 절경을 담은 그의 그림은 명상적이고 철학적인 분위기가 배어 나온다.

    다분히 설화적이고 민속학의 ‘제의’를 떠올리게끔 하는 샤머니즘적인 요소도 짙게 깔려 있다. 서양화를 그리면서도 어느 작가보다 한국적이라는 평을 듣는 이유다. 그의 그림이 집요하게 규칙과 고집을 지켜가듯 일관되게 이어져 온 건 지금보다 젊었던 시절의 한 ‘때’가 있어서였다.

    “2년에 한 번씩 여는 남해안 별신굿을 우연히 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굿을 보고 정신이 혼미해졌어요. 그리고 박물관에서 향토사를 공부하면서 한 선생님을 만난 계기로 통영의 역사를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가 새로운 세계를 처음 맞닥뜨린 제 ‘결정적 순간들’이었어요. 제 그림은 그때부터 한국의 무속과 설화, 전설, 민속문화를 소재로 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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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 미륵산으로 올라가는 케이블카에서 바라본 통영 앞바다 풍경.


    미륵산 정상은 그런 그가 꼭 ‘가야만 하는’ 장소다. 통영을 모두 품은 미륵산은 하늘과 땅, 바다 모두를 맞대고 있는 소통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곳의 풍경은 올라올 때마다 늘 미묘하게 조금씩 달라요. 그래서 올라올 때마다 이렇게 담아갑니다. 운이 좋은 날엔 금빛 바다도 볼 수 있어요.” 연신 카메라의 셔터를 누르던 작가는 딱 필요한 말만 꺼내곤 이내 내려가자고 재촉한다. 다시 인파를 뚫고 평지로 내려가는 케이블카 안에 들어왔다.

    내려가는 길. 만남과 헤어짐과 때에 관한 이야기가 오갔다. 그런 그가 살아오며 후회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물어보지 않았다. 후회했든 후회하지 않았든 선택의 순간마다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온 힘을 다해 섭리대로 살아왔을 테니 말이다.

    “산과 바다, 하늘이 모두 그대로 있기에 힘이 닿는 데까지 저도 누가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묵묵히 이곳에 있으려 합니다.” 자기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려 한다는 그에게서 안온한 위로를 얻고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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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온 힘을 다해 자기만의 방식을 고수하며 살아가는 것은 값지다. 그것이 대단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닐지라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후회와 맞바꿔야 할 얄궂은 운명이 될지라도. 어쩌면 우리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 다른 도리가 없음을 이미 알고 있기에, 어김없이 후회의 순간을 달게 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도영진 기자 dororo@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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