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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15) 다자이 오사무/사양(斜陽)

  • 기사입력 : 2016-01-25 14:3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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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십년 전, 하동의 어느 마을에 사방사업(砂防事業)으로 큰 돈을 번 남자가 있었다. 그는 사업수완이 탁월했을 뿐 아니라 용모도 멋들어졌고, 풍채도 좋았다. 형편이 넉넉하니 베푸는 씀씀이도 컸다. 어느 날 마을에 절름발이 여자 하나가 홀연히 나타났다. 근본도 모르고, 나이도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여자였는데, 어찌어찌 마을의 버려진 허름한 집에 눌러 앉더니 사람들과 안면을 트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차차 알게 됐다. 비록 다리를 절긴하지만 여자에겐 삶에 대한 욕구로 충만한 영민한 두 눈이 있다는 것을, 웃으면 살짝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희고 고른 치아가 있다는 것을, 나름대로 격조있는 자세와 말투를 가졌다는 것을.

     
    그러던 어느 날 여자는 남자를 찾아갔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부탁입니다. 제가 부쳐먹을 조그만 땅 하나만 빌려주세요.' 남자는 그렇게 했다. 그에겐 남아도는 땅이 많았다. 여자는 그 땅에 여러가지 푸성귀를 심어 먹으며 생계를 이었다. 남자는 직접적이진 않지만 남의 눈에 잘 띄지 않는 이런저런 경로로 여자를 도왔다. 여자는 애써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여자는 세상의 섭리에 따라 받는 것이 있으면 응당 치러야 할 대가가 있는 법이라 여겼을 것이고, 남자가 언젠가는 그녀에게 무언가를 원하리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 그저 여자가 삼시세끼 굶지 않을 정도로, 딱 그만큼만 무심하게 그녀를 돌봤을 뿐이다.
     
    오히려 여자가 남자에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어느 날 여자는 남자를 한 번 더 찾아갔다. 그리고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부탁합니다.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아이만 낳게 해준다면 더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조용히 여기를 뜨겠어요.' 남자는 망설였다. 그에게는 아내가 있었고 두 아들과 두 딸이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아내와 가족을 사랑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남자는 여자의 청을 들어줬다. 그들은 단 하룻밤을 함께 보냈다. 이듬해 여자의 배는 점점 불러왔고, 다리를 절면서 무거운 배를 부여잡고 텃밭에서 푸성귀를 가꿨다. 그리고 그해 가을, 여자는 건강한 아이를 출산했다. 여자의 생기있는 까만 눈, 남자의 잘 생긴 코와 턱선을 그대로 빼닮은 사내아이였다.
     
    여자는 마을을 떠나기 전 남자의 집으로 갔다. 그리고는 남자의 아내가 있는 안방으로 불쑥 들어갔다. 포대기에 싸인 갓난아이를 안고서였다. 놀란 남자의 아내가 소스라치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절름발이 여자는 옆도 돌아보지 않고 불편한 몸을 가누며 앞으로 앞으로 나갔다. 그리고 아내와 남자가 다정하게 잠을 청할 것이 분명한 명주 솜 이불 위에 한마리 학처럼 다소곳이 앉았다. 그리고 한참이나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가 칭얼댔지만 절름발이 여자는 달래지 않았다. 다 안다는 듯, 남자의 아내도 아무말 없이 그녀의 돌발적인 행동을 묵묵히 받아들였다. 남자의 아내가 아이를 받아안아 얼르며 울음을 달랬다. 그런 연후에 절름발이 여자는 아이를 들쳐업고 마을을 떠났다. 그리고 남자와 약조했듯 죽을 때까지 다시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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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훗날, 아주 먼 훗날, 남자가 세상을 뜨고 절름발이 여자도 세상을 뜬 뒤, 그녀의 아들과 남자의 아이들은 서로를 찾았다. 핏줄은 핏줄을 끌어당겼고, 천륜은 천륜을 알아봤다. 지금 그들은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처럼 격의없이 지내고 있다. 명절에 서로의 집을 오가고 대소사를 챙긴다. 이 이야기는 그날 절름발이 여자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결기로 남자의 집에 찾아가 이부자리 위에 오도카니 앉았다 사라진 일련의 사태를 모두 지켜봤던, 남자의 막내딸이 내게 해준 이야기다. 그녀는 절름발이 여인의 아들을 스스럼없이 '동생'이라고 했다.
     
    '제가 당신을 만난 건, 벌써 6년 전 옛날입니다. 그때 저는 당신이라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좋아하지도 싫어하지도,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언젠쯤부턴가 당신이 안개처럼 제 가슴에 스며들었습니다. 당신이 그립고, 이것이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너무나 허전하고 외로워 혼자 훌쩍훌쩍 울었습니다. 당신은 다른 남자들과 전혀 다릅니다. 저는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습니다.

    훨씬 오래 전, 당신이 아직 혼자였을 때 그리고 저도 혼자였을 때 서로 만나 두 사람이 결혼했다면 저도 지금처럼 괴로워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저는 이제 당신과의 결혼을 불가능하다고 단념했습니다. 당신의 부인을 밀쳐내는 것, 그건 비열한 폭력 같아서 전 싫습니다.
    저는 상식이라는 걸 알지 못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게 바로 좋은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신의 아기를 낳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기는 낳고 싶지 않습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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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은, 대체 어디서 일어나고 있을까요. 적어도 우리들 주변에서 낡은 도덕은 여전히 그대로 털끝만큼도 바뀌지 않은 채, 우리의 앞길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바다 표면의 파도가 아무리 요동친들 그 밑바닥의 바닷물은 혁명은커녕 꿈쩍도 않고 자는 척 드러누워 있을 뿐인 걸요. 하지만 난, 지금까지의 제1회전에서 낡은 도덕을 아주 조금이나마 몰아낼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번엔, 태어날 아기와 함께 제2회전, 제3회전을 싸워 나갈 작정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나의 도덕 혁명의 완성인 것입니다. 당신이 나를 잊는다 해도, 나는 내 혁명의 완성을 위해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을 자랑으로 여기며, 또한 태어날 아이한테 당신을 자랑으로 여기도록 할 겁니다. 우리는 낡은 도덕과 끝까지 싸워 태양처럼 살아갈 작정입니다.

    난 이제 당신에게 아무것도 부탁드릴 마음은 없습니다만, 한가지 허락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건, 내가 낳은 아기를 단 한번만이라도 좋으니, 당신 부인이 안아 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나 자신도 왜 그런 부탁을 하는건지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그렇게 해야만 합니다. 불쾌하신가요? 불쾌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이것이 버려지고 잊혀져 가는 여자의 하나뿐인 안쓰러운 투정이라 여기시어, 꼭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 소화/다자이 오사무/'사양(斜陽)' 109·20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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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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