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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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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13) 박지원/연암억선형(燕巖憶先兄)

  • 기사입력 : 2015-12-18 14: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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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잠을 깬 건 새벽 4시를 막 지나던 참이었습니다.
    사방은 캄캄했고, 무엇하나 소리내어 움직이는 것이 없었습니다.
    겨울밤은 마치 두터운 적막을 품은 거대한 산 같이 느껴졌어요.
    동이 트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겁먹은 짐승처럼 이불 속에 움츠린 채 말이죠.
    옅은 에메랄드 빛이 땅 아래에서 하늘 꼭대기로 퍼져나가더니 불현듯 아침이 오더군요.
    새가 지저귀고, 자동차가 움직이고, 음식 냄새가 사방에 퍼지고… 세상은 조금씩 소란스러워지고 있었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씻고, 옷을 갈아입고, 화장대 앞에 앉았습니다.
    평소처럼 분홍이나 오렌지에 가까운 아이섀도로 눈두덩이를 칠하려다, 방금 보았던 새벽빛을 닮은 색을 골라 쌍꺼풀 위에 쓱 발라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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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잠들 수 없었던 건 꿈 때문이었습니다.
    내 꿈자리에 당신이 찾아온 것은 처음이었거든요.
    제발 한번만 꿈에 나타나 '나는 잘 있다'는 말 한마디만 해주었으면 하고 바랐던 날이 얼마나 많았는 줄 아나요.
    그런데 그 기도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해버린 지금에서야 당신이, 이렇게 갑자기 나를 찾아온 겁니다.
    당신이 떠난 그해 여름부터 지금까지, 꼬박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렸군요.
    당신의 유순하고 부드러운 성품은 누군가를 애 태우는 것과는 거리가 한참 멀었는데, 대체 왜 그랬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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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텅 빈 방이었어요. 생전 처음보는 낯선 곳이었고, 나는 홀로 남겨져 있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무언가를 간절하게 기다리는 것도 같았고, 소중한 것을 잃고 크게 상한 마음을 가만히 달래는 것도 같았습니다.
    딱딱한 의자에 앉아 있었어요. 그냥 그렇게, 꽤 오래 앉아 있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방 한가운데에 있는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갔습니다.
    밖은 광활한 평야였어요. 건조하고 무자비한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렸고 끝없는 지평선이 두 눈을 아프게 찔렀습니다.
    그리고 내 앞에, 당신이 서 있었습니다.
    당신은 내가 마지막으로 본 차림 그대로였습니다. 긴 목에 넓은 어깨, 납작한 귀, 크고 긴 손가락 마디마디… 모든 것이 그대로였어요.
    나는 내 눈을 의심해야 했습니다. 당신의 육체가 모두 불 타 사라지는 것을, 2년 전 여름 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거든요.
    심지어 가루로 남은 당신의 잔해가 묻힌 산 등성이에서 미친여자처럼 엉엉 울다 내려오기도 했는 걸요.
    아무것도 모르는 당신은 웃으며 내게 말하더군요. '너를 기다리고 있었다'고요.
    천만에요. 지금껏 당신을 기다린 건 바로 나였는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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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은 1929년에 태어났습니다. 다섯 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지만 장자(長子)가 되어야만 하는 운명을 가진 사람이었죠.
    죽음이 흔하던 시절, 당신은 누님 한 분, 형님 한 분, 남동생 하나를 차례차례 잃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당신과 15살 차이가 나는 막내 동생 하나만을 겨우 붙들 수 있었죠.
    당신의 부모가 세상을 뜬 뒤에는 가장이 되어 집안을 건사하고 철부지 동생을 자식처럼 길러야했던 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당신은 일제시대에 드물게도 고등교육을 마쳤습니다.
    중고등학교 시절, 학교를 파하고 어둑해져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어김없이 칼을 찬 일본순사들이 뒤쫓아와 학도병에 지원하라고 당신을 협박하거나 회유했다고 했었죠.
    대학을 다닐 땐 창원에서 부산 서대신동에 있던 캠퍼스까지 매일 기차를 타고 통학을 했다고도 했었죠.
    그렇게 어렵게 대학을 졸업한 뒤엔 한 고등학교에 교편을 잡아 조용하고 점잖은 교장 선생으로 나이먹어 갔습니다.
    그런 옛 이야기들을, 꼬마였던 나는 당신의 넓은 무릎 위에 앉아 토끼처럼 귀를 쫑긋 세우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상상했었죠. 당신이 당신의 다른 형제들처럼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었다면, 혹은 학도병으로 끌려가 전장에 내몰렸다면, 나는 이 세상에 없겠구나, 하는 그런 상상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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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에게도 꿈이 있었죠.
    대학시절 당신은 불어에 능통했었고, 때문에 프랑스 문학에 심취했던 문학도이기도 했었다는 이야기를, 그리하여 언젠가는 위대한 시인이 되려는 꿈을 꾸었다는 이야기를 나는 당신이 떠난 뒤에 전해들었습니다. 그래요, 돌이켜보면 당신은 단 하루도 책이나 펜을 손에서 놓은 법이 없는 사람이었죠.
    그런 순수한 꿈말고 세속적 욕망도 있었습니다.
    당신은 창조적이고 손재주 있는 큰 아들은 공학기술자로, 사리판단이 명확하고 꼼꼼한 둘째 아들은 법률가로 키워보고 싶었죠.
    전쟁과 분단 이후 당신 세대가 힘겹게 일궈놓은 1970년대 대한민국은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성장가도?위에서?미친듯이 팽창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아이들이 다가올 새로운 세상의 주인공이 되었으면 싶었죠. 그리고 그 주인공 자리를 꿰찰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을 당신은 미리 점치고 있었던 겁니다.
    물론 자식들은 당신 뜻대로 자라주지 않았습니다. 두 아들은 각자 하고 싶은 일을 제스스로 찾아갔고, 당신은 묵묵히 뒤에서 아들들을 응원하고 지원했습니다.
    막 자라나는 나뭇가지의 방향을 비틀면 부드럽게 휘는 것이 아니라 둔탁하게 부러져버린다는 것을, 당신은 이미 잘 아는 사람이었거든요.
     
    지금, 당신의 그 두 아들이 당신의 기일마다 당신의 제사상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병풍을 펴고, 멧밥을 올리고, 초에 불을 켜는, 아주 오랫동안 당신이 주관해왔던 의식들을 이제는 당신의 두 아들이 하고 있습니다.
    당연하게, 그러나 공교롭게 두 사람은 당신의 모습을 많이 닮았습니다. 긴 목, 납작한 귀, 넓은 어깨, 크고 긴 손가락 마디마디…
    당신이 그리울 때면 나는 당신의 두 아들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완전히 다른 사람들이지만, 조금이나마 더 닮고 비슷한 구석이 있나 없나 몰래 곁눈질로 살펴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또다시 시간이 흘러 당신의 두 아들마저 내 곁을 떠나면, 나는 누구를 바라보며 당신을 떠올려야 할까요.
    피는 질기고, 독하고, 진한 것이라는 데, 여자인 내 살과, 뼈와, 얼굴 어느 한 곳 정도는 당신을 닮은 구석이 있겠지요.
    그 곳에 어딘지 알려준다면, 내 몸을 내가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며 당신 생각을 했으면 합니다.
     
    我兄顔髮曾誰似(아형안발증수사) 우리 형님 얼굴 수염 누구를 닮았던가?
    每憶先君看我兄(매억선군간아형) 돌아가신 아버님 그리울 때마다 우리 형님 쳐다봤지
    今日思兄何處見(금일사형하처견) 이제 형님 그리운데 어디에서 볼까?
    自將巾袂映溪行(자장건몌영계행) 스스로 두건 쓰고 도포 입고 가서 냇물에 비친 나를 보아야겠네
     
    -박지원/'연암억선형(燕巖憶先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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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 속, 광할한 평야에 서있던 당신은 내게 '무엇이 먹고 싶냐'고 물었습니다.
    무엇이 먹고 싶냐구요? 당신의 온전한 모습을 2년 만에 보게 된 손녀에게 뜬금없이 무엇이 먹고 싶냐니, 나는 뺨이라도 한대 얻어맞은 듯 얼얼한 심정이었습니다.
    당신은 머뭇거리는 나를 이끌고 어딘가 따뜻하고 밝고 아늑한 공간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거기엔 한상 가득 따스하고 향기로운 음식이 차려져 있었어요. 우리는 함께 그것을 먹었습니다. 오손도손 대화를 한 것도 같은데, 그 내용은 기억나지 않습니다.
    음식을 다 먹고나자 당신은 당신의 품 안에서 작은 꾸러미를 꺼내어 내게 주려고 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지만 내 삶에 있어 매우 요긴하게 쓰일 어떤 것이라는 것을,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습니다.
    당신은 그것을 건넸고, 나는 그것을 두 손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막 열어보려는 찰나에, 당신은 감쪽같이 내 앞에서 사라졌습니다.
    순식간이었죠. 그래요, 2년 전 여름 그 날처럼 또 홀연히 당신은 내 곁을 떠난 겁니다.
    하지만 나는 이전과 같이 서럽게 울지는 않았어요. 그저 무덤덤하게 잠을 깨어 옷을 갈아입고 회사로 출근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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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이 차가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점심께부터 급하게 곤두박질 친 기온이 도심 위로 구름을 잔뜩 몰고 왔습니다.
    그리고 급기야 오후 6시, 퇴근길 도로 위로 눈발이 흩날리더군요.
    집에 도착해 주차를 한 뒤 시동을 끄고 한참을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제법 굵은 눈이 흩날리고 있었고, 차창에 닿은 눈은 형체를 어그러뜨리며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눈이 내려앉은 자리엔 새 발자국 같은 물기만이 영롱하게 남아 있었죠.
    그 맑은 물방울을 관통하는, 조금은 왜곡된 바깥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습니다.
    다시 어둠이 내린 세상은 수만가지 소리와 빛을 한데 응축한 진공처럼 묵묵하고 먹먹했죠.
    그때 뭔가 차가운 것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고,?그래서 조금은 당황했던 것도 같아요.
    급한대로 옷소매를 걷어 눈가를 훔쳐보았습니다.
    거기엔, 아침나절 눈두덩이에 발라놓았던 에메랄드 빛이 촉촉하게 묻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눈물은 잠깐이겠지요.
    내일은 다시 평소와 같이 분홍이나 오렌지에 가까운 색으로, 그렇게 되돌아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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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암억선형(燕巖憶先兄)'은 조선후기 실학자였던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1737~1805)의 절창 중에 절창으로 꼽히는 시다.
    제목 그대로 '연암에서 돌아가신 형을 그리는' 가슴 아픈 내용을 구구절절 담았다.
    박지원이 홍국영(洪國榮)의 핍박을 피해 개성 외곽의 연암 골짜기에 숨어 살 때 형 박희원(朴喜源)을 그리워하며 지었다.
    박지원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보고 싶을 때마다 아버지의 모습을 꼭 닮은 형님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런데 그 형님마저 세상을 떠나고 없다.
    그래서 그는 의관을 정제하고 나가 흐르는 냇물에 자신의 얼굴을 비춰 본다. 바로 자신이 아버지와 형님을 그대로 빼닮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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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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