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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운명의 주인인가? 노예인가?- 최환호(경남대 초빙교수)

  • 기사입력 : 2015-12-0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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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야흐로 한 치 앞도 모를 무한불안·공포의 시대.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주장하듯 사냥감이 되지 않기 위해 사냥꾼이 돼야 하는 ‘무한경쟁’의 불안사회다. 게다가 리처드 세넷이 강조하듯 조직으로부터 항시 퇴출의 두려움을 안고 살아야 하는 ‘무한공포’의 사회.

    17세기 영국 성직자 로버트 버턴은 “푸른 비단옷을 입고 왕관을 쓴 이로부터 무명옷을 입은 자에 이르기까지 불안은 모든 인류가 겪는 고통”이라 했거늘. 인류 역사상 그 어느 시대보다 최대 최고의 문명을 누리는 찬란한 시대가 왔지만, 왜 불안을 느끼는지, 어떻게 하면 덜 느낄 수 있는지에 대해선 별로 알아낸 것이 없다는 게 불안 연구자 앨런 호위츠의 결론(‘불안의 시대’)임에야. 오히려 불안과 공포가 생존의 전제조건인가?

    동서고금, 인종불문, 연말연시에 걸쳐 사이비 종교, 미신, 속신에 영혼을 사로잡힌 이가 그 얼마였던가. 근현대 한국사에 사이비 ‘재림주’와 ‘하나님’은 120명이 넘은 게(한국민속연구원)’ 그 방증이며, 목하 진행 중이기에.

    시절이 하수상한 난세일수록 미신이나 속설, 금기는 더욱 호화찬란하고 치명적 독소를 퍼뜨리는 법. ‘수능·대입 대박’ 광풍은 새 발에 피다. 소문난 점집은 부적 1장에 100만원 이상, 인터넷선 1만~2만원을 호가하고, 급기야 중고 매매에 셀프부적까지….

    막스 베버의 통찰. 근대화는 “탈(脫)주술의 과정이었다.” 삶은 늘 실존적 선택의 문제 아니던가. 생김새와 생년월일로 미리 결정된 운명을 알 수 있다는 음험한 숙명론의 주술에 평생 허우적거릴 것인가? 마음을 닦고 계발하면 원대한 꿈을 이룰 수 있는 주체적 삶을 지향할 것인가?

    시경(詩經), 서경(書經)과 더불어 유교 주요 경전인 주역(周易)을 탐독해보라. 단순히 길흉을 점치는 점서가 아니라, 우주의 이치와 그 다양한 변화에 대응하는 방법을 가르치는 지혜서인즉. 주역이 말하는 길흉은 인간이 체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고정불변의 운명적 결과가 아니라, 성실을 다하여 올곧게 살아감으로써 좋은 괘는 더 좋게, 나쁜 괘는 좋은 방향으로 바뀐다는 거다. 우주적 리듬에는 길흉화복이 없다. 다만 끊임없이 변해갈 뿐.

    노자 도덕경의 한 구절. “불행은 복이 의지해 성장하는 곳이고 복은 재앙이 숨어 있는 곳이다. 결합은 헤어짐의 시작이고 즐거움은 근심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禍兮福所依 福兮禍所伏 合者離之始 樂兮憂所伏).”

    서양 속담에도 ‘낮에는 밤이 따르고 행복에는 불행이 따르는 법’이거늘. 화와 복이 서로 맞물려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화복은 문이 따로 없으니, 그저 사람이 부르는 것(禍福無門, 唯人所召)”에 달렸으리니. 세상만사 ‘새옹지마 호사다마(塞翁之馬 好事多魔)’라. 그러니 일희일비는 금물이다. 만사 잘 풀린다고 희희낙락할 것도 아니고, 역경에 처했다고 낙담좌절할 일도 아니다.

    중국 명대 일화. 용하다는 점쟁이의 말을 하늘로 삼고 운명의 노예가 되어 찾아온 젊은이를 향한 운곡 선사의 질타. “그대가 호걸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범부에 불과하구나. 운명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고, 복은 자신이 구하는 것이다.”

    참 종교, 철학 및 최신의 정신과학 등은 환경결정론 및 유전자 지배이론을 넘어 진취적 자기계발의 잠재력을 통해 이미 수천 년간 운명결정론에 맞서 인류의 정신사를 도도히 정립해오지 않았던가.

    고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을 터. 자기 삶을 완벽하게 장악하여 운명의 주인이 되는 사람과 미신, 돈… 그 무엇인가에 사로잡혀 운명의 노예가 되는 사람이다.

    최환호 (경남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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