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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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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포럼] 어느 먼지의 고백- 김지율(시인)

  • 기사입력 : 2015-11-1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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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 전 뉴스를 보다가 25년 전 보이저 1호가 지구로 보낸 사진 한 장을 보았습니다.

    그 사진 속에는 우주 속에 떠 있는 작고 푸른 점 하나가 있었습니다. 보일 듯 말 듯 그 작은 점은 수많은 나라와 인종 그리고 종교와 이념들로 엉켜 있는 지구라는 별입니다.

    그 사진을 보며 칼 세이건은 “지구에 사는 모든 존재는 한 줄기 햇살 속에 흩날리는 먼지, 티끌 하나에서 살고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저는 가끔씩 이 별에 살고 있는 것이 기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 지구에 발을 붙이고 살면서 당신을 만나고, 무수한 관계의 틈에서 똑같은 아침을 맞이하는, 낙엽 떨어진 비 오는 이 골목의 오늘 하루가 정말 신기한 기적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요. 당신의 하루가 그리고 저의 하루가 이렇게 작은 점에서 아웅다웅하고 있습니다.

    수능시험은 잘 치렀을까요. 요양원의 아침 햇살은 어떤가요. 리어카에 종이박스를 가득 실고 있는 당신께. 노란 버스에 아이를 마중하는 당신과 분식점에서 혼자 점심을 들고 있는 당신에게도 늦은 안부를 전합니다.

    언제부턴가 그냥 묵묵히 아래만 보는 사람들이 좋아졌습니다. 아마 좋은 날보다 그저 그런 실패하고 두려운 날들이 더 많아지기 시작한 때부터였을까요.

    가족사진 한 장 없이 곁을 떠난 당신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다시’라는 말을 싫어하는 나의 스승 때문인 거 같기도 하고, 혼자서 영화를 보고 돌아오던 오늘같이 쏟아지던 비 때문인 거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하루도 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시끄럽습니다. 쌀값 폭락과 위안부 할머니 생활비 중단문제도 있었군요.

    부패와 경제 불안으로 근본적인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루마니아 사태를 보면서 우리 현실이 많이 부끄러웠던 건 왜일까요.

    N세대, 헬조선, 열정페이라는 말도 참 씁쓸합니다. 위태롭고 절박한 현실에서 정의가 있다면 그것은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것일 때 더 정의로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가 태어나기 수만 년 전부터 이 별에 살고 있었던 당신, 상상할 수 없을 먼 미래의 이 대한민국에도 수많은 당신이 계시겠죠.

    불안과 절망, 분노의 현실은 또 우리보다 먼저 와서 이렇게 아침을 맞이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이 창백한 푸른 점 속에 보이지 않는 먼지로 하루를 살고 계실 당신을 그리고 당신의 아픈 이웃을 생각해보시기를!

    우주와 대자연의 숭고함 앞에서 저의 존재는 얼마나 보잘것없는지요.

    키 큰 사람이 거인이 아니라 생각이 큰 사람이 거인이 아닐까요. 흔들릴 때는 삶을 최소한으로 줄이거나 욕심을 버리는 방법 또한 삶과 싸워 이기는 것 못지않게 훌륭한 대처 방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우리 모두 실은, 핵과 같은 상처를 감싸고 입을 꼭 다물고 있지 않나요. 침묵 깊숙이 심장까지 찌르고 들어오는 아픔에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니신지. 저보다 몇 배 더 아플 당신께 조용히 고개 숙입니다.

    케테 콜비츠의 ‘이별’을 보면서, 정신병원에 가기 직전에 썼던 니진스키의 절규하는 일기를 한 줄 한 줄 읽을 때도 저는 정말 보이지 않는 붉은 먼지였습니다.

    삶을 견디게 하는 것과 삶을 견디지 못하게 하는 그 사이에서 약간 귀도 멀고 눈도 멀어 볼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좋습니다. 저는 이 점 속의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먼지라서 더 불가능한 존재여서 가능한 한 더 오래 버티고 있습니다. 오늘은 문득 사진 한 장에 자꾸 마음이 가는 하루입니다.

    김지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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