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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05일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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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봅시다] 최치원 체계적 연구 나선 김정대 고운학연구소 초대 소장

“최치원 ‘문화한류 브랜드’ 바탕되는 연구 초석 다질 것”
최치원 선생 학문·사상과 함께 지역사회 인문학 연구
경남대는 월영서원 등 발자취 많이 남아 의미있는 곳

  • 기사입력 : 2015-11-1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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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운학연구소 김정대(경남대 국문과 교수) 소장이 경남대 인문관 내 고운학연구소 앞에서 밝은 표정을 짓고 있다./김승권 기자/


    신라시대 문신이자 문장가인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857~?)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고 보급하기 위한 ‘고운학연구소’가 지난달 20일 경남대학교에서 문을 열었다. 그동안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 이를 재구성해 문화관광 상품화하려는 움직임은 있었지만, 대학에서 연구소를 개소해 최치원 선생의 학문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려는 시도는 경남대가 전국 최초여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고운학연구소 초대 소장을 맡은 김정대(62) 국어국문학과 교수를 만나 연구소의 설립과 역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들었다.



    -고운학연구소에 대한 소개를 부탁드립니다.

    ▲고운학연구소는 통일신라 말기 대학자인 고운 최치원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연구하고 그 정신을 이어받기 위해 경남대가 최근에 설립한 연구소입니다. 1차적으로는 고운 선생이 직접 남긴 업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지만, 고운 선생과 관련된 업적들도 함께 연구할 예정입니다. 최치원 선생은 지금의 창원시 마산합포구 월영동에 ‘월영대(月影臺)를 짓고 자연을 감상하면서 인재들을 키웠는데, 고려·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시인·묵객·학자들 중 월영대를 둘러보고 고운 선생을 기리는 시를 남기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입니다. 고려의 정지상(鄭知常)·김극기(金克己)·채홍철(蔡洪哲)·안축(安軸), 조선의 이첨(李詹)·정이오(鄭以吾)·이황(李滉)·정문부(鄭文孚)·박사해(朴師海)·손기양(孫起陽)·이민구(李敏求) 등이 이곳을 순례하고 남겨 놓은 글들이 ‘동문선(東文選)’,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 남아 있는데, 이런 글들도 연구대상에 포함됩니다. 또 지역사회와 관련되는 인문학도 포괄적인 ‘고운학’의 범주로 잡고 지역사회 인문학 진흥에도 힘을 쏟을 예정입니다.

    -대학에서 최치원 선생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연구소 설립은 경남대가 처음이라고 들었습니다.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모든 문화 상품은 ‘응용’의 결과입니다. 응용을 하기 위해서는 기초가 필요합니다. 기본기 없이 응용을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고운 선생의 발길이 머물거나 스친 곳은 전국에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중앙정치에 관여했던 땅 경주를 비롯해, 지방 장관 벼슬살이를 했던 대산군(大山郡·전북 태안)·천령군(天嶺郡·경남 함양)·부성군(富城郡·충남 서산), 정치계를 떠나 유람했던 경주의 남산, 강주(의성)의 빙산, 합천 청량사, 지리산 쌍계사, 그리고 합포(창원) 등 다양한 곳에 흔적을 남겼습니다. 일부 연고지의 지방자치단체에서는 ‘고운로’를 여는 등 선생을 현창하는 여러 사업들을 추진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전인수식의 지나친 경쟁으로 고운 선생을 끌어들인다면, 그것은 역사 왜곡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본기에 해당하는 정확한 연구부터 하는 것이 도리일 것입니다. 대학 내에 위치한 연구소로서 이를 먼저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최치원 선생과 경남대학교는 각별한 인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것들이 있습니까.

    ▲최치원 선생의 발자취가 가장 많이 남은 곳은 합천과 창원(옛 마산)입니다. 합천 해인사에 있는 고운 선생의 친형인 현준스님 등 여러 인연으로 합천에 선생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최치원 선생 하면 ‘월영대’, ‘합포현 별서’, ‘고운대’로 이어지는 합포에서의 생활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별서’는 한적한 곳에 세운 별장이라는 뜻인데, 최치원 선생이 머물렀던 합포현 별서는 정황상 경남대 안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또 별서 근처에 월영대가 있는데, 이는 바닷가에 세워진 누각입니다. 또 고운대는 현재 무학산 학봉을 가리킵니다.

    고운 선생은 별서에 묵으면서 월영대에서 시를 읊고 후학을 가르쳤으며, 고운대에 올라 기울어져 가는 고국의 정세를 걱정했을 것입니다. 별서와 월영대 등은 최치원 선생 혼자만의 힘으로는 세울 수 없었겠지요. 당시 선생을 흠모하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는 증거입니다. 창원과 고운 선생의 인연은 여기에 그치지 않습니다. 고운 선생을 존경하는 후학들이 1713년(숙종 39년)에, 지금 경남대 법정관 자리에 ‘월영서원’을 세워 선생을 기리고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월영서원은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손됐지만, 훼손된 서원을 경주최씨 두곡 문중에서 1902년 창원시 마산회원구 두척동에 ‘두곡영당(斗谷影堂)’을 다시 지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창원지역은 고운 선생의 발자취가 숱하게 남아있는 곳이고, 그 중심에 경남대가 있습니다. 특히 옛 경남대 부지는 고운 선생의 별서가 있던 곳이자 산책로였으며, 월영서원이 있었던 인연이 있는 곳입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라도 이곳에 연구소를 세워 고운 선생의 학문과 사상을 심도있게 연구하고자 합니다.

    -이처럼 다양한 콘텐츠들을 활용해 고운 최치원 선생을 새로운 문화 한류 브랜드화하는 작업도 가능할 것입니다. 연구소에서는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까요.

    ▲고운학연구소에서는 최치원 선생이 남긴 업적을 중심으로 선생을 흠모한 후학들이 남긴 업적과 지역 인문학 연구 등 학문적 연구가 일차적 과제입니다. 즉, 연구소에서는 다양한 문화 한류 브랜드를 만들 수 있는 ‘토양’을 형성하는 데 매진하고자 합니다. 연구 성과가 어느 정도 쌓이면 그때 한류 브랜드 문제를 고민할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 마산만이 내려다보이는 경남대 부지 안에 ‘신(新)월영대’를 짓고, 한옥의 형태를 갖춘 ‘월영학당’과 ‘게스트하우스’ 등을 짓는 일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신월영대는 상징적인 건물로, 전통 예절 교육을 비롯한 한자·한문 등의 교육을 월영학당에서 맡는 것이지요. 학생들의 방학 기간을 활용하는 것이 효과적이기 때문에, 게스트하우스를 지어 놓으면 수강생뿐 아니라 일반 탐방객들 역시 유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일들은 적지 않은 자금을 필요로 합니다. 창원시와 뜻있는 향토 기업가, 최씨 문중 등 고운 선생과 관련이 있는 여러 사람들과 손을 잡아서 해결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손을 잡고 최치원 선생 한-중 탐방로를 개설하는 것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운 선생이 중국에서 유학하고 벼슬도 했기 때문에 중국에서 고운 선생을 기리는 작업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할 정도라고 합니다.

    -앞으로 연구소가 나아갈 방향과 추진하고 있는 계획이 있다면.

    ▲먼저 그동안의 최치원 선생 관련 업적들을 모으고, 또 고운 선생을 연구해 왔던 개인이나 단체와 네트워크를 형성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난 6일 경남대 인문과학연구소와 함께 ‘최치원의 학문과 사상’이라는 주제로 고운학연구소 개소를 기념하는 학술 세미나를 열었습니다. 이 자리에는 국내 최치원 연구 권위자들뿐만 아니라, 경주최씨 중앙종친회장님을 비롯한 최씨 문중에서도 많은 분들이 참석했습니다. 이것이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첫걸음일 것입니다. 내년 이맘때쯤에는 그동안의 연구 성과를 짚어 보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을 점검하는 학술회의를 가지고자 합니다. 이런 성과가 쌓이면 이를 바탕으로 한 한류 브랜드화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김언진 기자


    ▶ 김정대 고운학연구소 초대 소장은

    1953년 창원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이 지역을 떠난 적이 없는 ‘창원 토박이’다. 창원상남초등학교·마산중학교·마산고등학교·경남대 국어교육과와 동대학원을 거쳐 계명대학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국어 문법론·국어 방언학이 전공이며 10여년 전부터 경남 방언의 조사·연구·보존에 힘을 쏟고 있다. 2004년부터 10년간 국립국어원 주관 지역어조사위원회 위원으로서 경남 방언을 조사하고, ‘경남 창원 지역의 언어와 생활’ 등 저서 7권과 60여 편의 논문을 발표했다. (사)경남방언연구보존회 회장이기도 한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1975년 학생 기자로서 <고적 순례>를 집필할 때 첫 번째로 ‘월영대’를 택한 것이 월영대와의 첫 인연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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