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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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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지렁이 씨- 김소연

  • 기사입력 : 2015-10-0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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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늘고 게으른 비가 오래도록 온다

    숨어 있던 지렁이 씨 몇몇이 기어나왔다

    꿈틀꿈틀 상처를 진흙탕에 부벼댄다

    파문이 인다

    시커멓고 넓적한 우주에서

    이 지구는 수박씨보다 작고,

    지구상에서 가장 작은 지렁이 씨의 꿈틀거림도 파문을 만든다

    광활한 우주를 지름길로 떠돌다 돌아온 빗방울에는

    한세상 무지렁이처럼 살다 간 자들의 눈물이 포함되어 있다



    그 눈물이 파문을 만든다

    빗방울도 파문을 만든다

    이토록 오랜 비도 언젠가는 그치리라



    …… 그러면?



    그러면 지렁이 씨들의 꿈틀꿈틀, 생애 전체가 환부인 꿈틀꿈틀

    그들의 필적을 나는 바라보겠고, 시 쓸 일이 없겠다

    ☞ 대나무가 쓰는 시들이 있다. 허리 곳곳이 세우고 직립한 대나무가, 가지로 하늘을 만지며 사는 대나무가 이른 새벽에 쓰는 시들이 있다. 학이 남기고 간 깃털 같은 시들, 고요하고 담박하게 살아가는 노승의 얼굴 같은 시들, 심산 절간의 오후에 고이는 샘물 같은 시들…. 지렁이가 쓰는 시들이 있다. 설 수도 앉을 수도 없어 기어 다닐 수밖에 없는 지렁이가, 온몸에 흙을 묻혀 밥을 사야 하는 지렁이가 쓰는 시들이 있다. 맨살로 기어 다니다 보니 생애 전체가 환부인 꿈틀거림이 온몸으로 진창에 남기는 필적들! 군데군데 혈흔 번져 있는 초서(草書)들! 시인이 도처에 널려 있는 것이다. 물메기만 한 욕들이 튀어 다니는 시장바닥 구석에 앉은뱅이 관목처럼 박혀 있는 어머니들, 세상의 짐 모두 지고 다니다 짐자전거처럼 폐기된 아버지들, 기름 둥둥 떠다니는 연안에 묶여 있는 주인 없는 폐선 같은 아저씨들….

    ★이번 주부터는 1993년 ‘시와 시학’으로 등단한 이중도 시인이 ‘시가 있는 간이역’ 역장을 맡습니다. 이 시인은 삶과 자연 그리고 서정의 ‘현장’에 있는 시들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1970년 통영 출생. 1993년 『시와시학』으로 문단에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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