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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8일 (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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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예.담] (4) 詩 '통영2'와 충렬사에서 명정 가는 길

젊은 시인이 주저앉아 울먹였던, 엇갈린 사랑길
1935년 스물넷의 젊은 시인 백석은
통영 처녀인 열여덟 ‘난’에게 반한다

  • 기사입력 : 2015-07-02 22: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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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통영2 -백석

    구마산(舊馬山)의 선창에선 좋아하는 사람이 울며 나리는 배에 올라서 오는 물길이 반날

    갓 나는 고당은 가깝기도 하다

    바람맛도 짭짤한 물맛도 짭짤한

    전복에 해삼에 도미 가재미의 생선이 좋고

    파래에 아개미에 호루기의 젓갈이 좋고

    새벽녘의 거리엔 쾅쾅 북이 울고

    밤새껏 바다에선 뿡뿡 배가 울고

    자다가도 일어나 바다로 가고 싶은 곳이다

    집집이 아이만한 피도 안 간 대구를 말리는 곳

    황화장사 영감이 일본말을 잘도 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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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2의 전문이 실린 시비.
    처녀들은 모두 어장주(漁場主)한테 시집을 가고 싶어한다는 곳

    산 너머로 가는 길 돌각담에 갸웃하는 처녀는 금(錦)이라는 이 같고 내가 들은 마산(馬山) 객주 (客主)집의 어린 딸은 난(蘭)이라는 이 같고

    난(蘭)이라는 이는 명정(明井)골에 산다든데

    명정(明井)골은 산을 넘어 동백(冬栢)나무 푸르른 감로(甘露)같은 물이 솟는 명정(明井)샘이 있는 마을인데

    샘터엔 오구작작 물을 긷는 처녀며 새악시들 가운데 내가 좋아하는 그이가 있을 것만 같고

    내가 좋아하는 그이는 푸른 가지 붉게붉게 동백꽃 피는 철엔 타관 시집을 갈 것만 같은데

    긴 토시 끼고 큰머리 얹고 오불고불 넘엣거리로 가는 여인은 평안도(平安道)서 오신 듯한데 동백 (冬栢)꽃 피는 철이 그 언제요

    옛 장수 모신 낡은 사당의 돌층계에 주저앉어서 나는 이 저녁 울 듯 울 듯 한산도(閑山島) 바다에 뱃사공이 되어가며

    녕 낮은 집 담 낮은 집 마당만 높은 집에서 열나흘 달을 업고 손방아만 찧는 내 사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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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시 충렬사 외삼문 앞 계단에 이슬기 기자가 앉아 있다. 백석 시인은 이 계단에서 사랑한 여인 ‘난’이 사는 명정골을 내려다봤다고 전한다.
    이순신 장군께 죄송할 일이지만, 충렬사에서 이순신 장군의 충절과 애국심만 떠오르는 건 아니다. 한 청년이 돌계단에 앉아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 장면이 스쳐 지나간다. 군인들을 진두지휘했던 멋있는 장수의 일을 기리는 사람은 많으니, 그것보다는 한 여자의 마음 얻는 일이 다급했던 남자의 무거운 걸음을 되짚어 가보기로 했다. 지금으로부터 8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1935년 6월 초여름 무렵, 한 여자에 빠진 청년에 대한 이야기를 충렬사에서 시작할 수 있다.

    백석은 1935년 6월, 조선일보에 다닐 때 동료이자 친구인 허준의 결혼 기념 모임자리에 가서 통영에서 올라온 열여덟 ‘박경련’을 만난다. 평안도, 그러니까 한반도의 북쪽에서 온 남자에게 남쪽에서 온 여자는 바닷내가 나는 이국적인 꽃과 같았나 보다. 그는 박경련을 ‘난(蘭)’이라고 부르며 푹 빠진다. 사랑에 빠진 사람이 하는 일은 그 대상을 어떻게든 이해하고 싶은 것,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신현중과 함께 통영길을 떠난다.

    좋아하는 사람이 나고 자란 곳을 알기 위한 답사였다. 그는 그해 12월 ‘조광’에 시 ‘통영’을 발표한다. ‘김냄새가 나는 비’를 맞은 그는 6개월 뒤에 또 한 번 통영을 찾는다. 첫 번째 방문이 만날 기대를 하지 않고 찾아간 것이라면, 이번에는 만날 작정을 하고 방학 때 그녀가 산다는 ‘명정골’로 찾아간 것인데, 바람을 이루지 못한다. 백석은 난의 외사촌 서병직의 안내로 충렬사 등지를 둘러보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때 이후 발표한 시가 ‘통영2’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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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사는 1606년 7대 통제사 이운룡이 왕명으로 이순신의 위훈을 기리고 추모하기 위해 세운 사당이다. 매표소에서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면 강한루가 눈에 들어온다. 강한루 아래로 지나는 계단은 보기에도 오래됨 직하다. 백석이 명정을 내려다본 계단이 맞을까 갸우뚱거리니 두 분이 다가온다. 통영 충렬사 사무국의 김금순(40) 주임과 김영권(49) 문화해설사다. 백석이 앉았던 계단의 위치를 물었다.

    “강한루 아래, 외삼문으로 오르는 이 계단으로 추정하고 있어요. 강한루를 다시 지은 지가 얼마 안 됐거든요. 70년대 후반 충렬사 주변 민가를 사들이고, 성벽을 쌓아 높이면서 지금은 여기서 명정이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 강한루도 없고 지대가 낮았을 땐 충분히 여기서 명정이 보였을 거예요.” 사무국에서 바랜 사진 한 장을 봤다. 통영문화원 김일룡 원장이 기증한 일제강점기 때 사진이다. “이때 모습이 시인이 왔을 때와 비슷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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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은 강한루 등 다른 구조물에 가로막혀 충렬사에서 명정이 보이지 않지만 통영문화원 김일룡 원장이 가지고 있던 사진을 보면 명정이 보였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수리 중인 비각들을 지나 중문과 내삼문에 들어섰다. 맨 꼭대기에 있는 사당을 본다. 이순신의 영정이 있다. 이순신을 보고, 백석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당신 덕에 사당이 지어져 계단에 올라 명정을 바라볼 수 있어 좋았다 고백했을지, 수호신 같은 존재이면서 왜 난을 만나게 해주지 않았는지 푸념을 늘어놓았을지는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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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라갔던 길을 되돌아 내려온다. 오래된 계단과 다시 마주한다. 지금도 나무 사이로 명정동의 모습이 내려다보이지만 아쉽게도 명정은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높은 강한루에 올라도 마찬가지, 포기하고 계단에 주저앉았다. 끝부분이 닳아 모나지 않은, 곰보 같은 돌들이 흐른 시간을 증명한다. 오래된 돌에 앉아 행여 우물가에 있는 이가 난은 아니었을지, 경성에 올라갔다는 말이 거짓은 아닐지 한참 동안 바라봤을 그의 마음을 짚어본다.

    ‘동백이 피는 계절 시집 가버릴 것만 같은’ 사람을 찾으려 명정에 눈을 뒀을 백석. 상심의 깊이를 가늠할 수 없다. 그의 등 대신 계단을 툭툭 쳐주고 일어났다. 나올 때는 미처 눈길을 주지 못했던 400년 된 동백나무가 보인다. 동백 열매는 윤기가 반질반질해 꼭 난의 단단한 이마 같다. 이 동백나무는 동네를 지나던 난과 상심해 고개를 떨구고 들어선 백석, 그들의 흔적을 쫓은 지금의 풍경까지 모두 목격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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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통영 충렬사 앞 도로 건너편의 명정. 위의 샘을 ‘일정(日井)’, 아래 샘을 ‘월정(月井)’이라고 했다. 일(日)과 월(月)을 합해 명정(明井)이라고 부른다.

    충렬사를 나서 2시 방향을 보면 명정 입구인 은색 문이 보인다. 작은 횡단보도 2개를 건너면 갈 수 있다. 10시 방향에는 이 충렬사와 명정 사이 길을 떠올리며 시를 쓴 것이라는 징표, 통영2의 전문이 실린 시비가 있다. 시비에서 횡단보도를 하나 건너면 명정 앞이다. 난이 사는 동네 명정골의 이름이 된 명정은 1670년에 팠다고 전해지는데 위의 샘을 ‘일정’, 아래샘을 ‘월정’이라고 했다.

    일정물은 충무공 향사에 사용하고 월정물을 민가에서 사용했다고 한다. 일(日)·월(月)을 합해 명(明)정이라고 부르는데, 시체나 상여가 지나가면 물이 흐려진다고 전한다. 두 개의 우물 옆에는 타원형의 빨래터가 있다. 수위가 높지 않은 물은 더러울 거라 생각했지만 다슬기들이 빼곡히 붙어 있고, 돌 사이에는 이끼도 심하지 않았다.

    명정은 비오는 날 더 좋다. 평소에도 사람들이 자주 찾는 곳이 아니지만, 비가 내리는 날에는 작은 정원에 온 듯한 느낌이 든다. 이 우물가를 둘러싼 돌담장의 덩굴이 초록빛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이 풍경쯤이면 박경리 소설가의 ‘김약국의 딸들’에서 ‘고을 안의 젊은 각시들이 지분 내음을 풍기며 득실거린다’는 묘사가 이해되고, 낡은 항구의 처녀들이 붉은 동백꽃잎을 따다 띄우고 노는 모습이 그려진다.

    백석은 난과의 사랑을 이어가지 못한다. 첫사랑을 이루지 못했다는 아픔 이외에도 두고두고 아픈 기억이 된다. 자신에게 난을 소개시켜준, 통영행을 함께한 절친한 신현중이 1937년 4월 난, 박경련과 결혼하기 때문이다. 그는 친구와 사랑을 모두 잃은 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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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년 10월 조광에 발표한 시 ‘남향’에서 명정에 갔던 일을 한 번 더 쓰고 있다. ‘(…)이 길이다/얼마가서 감로같은 물이 솟는 마을 하이얀 회담벽에 옛적본의 장/반시계를 걸어놓은 집 홀어미와 사는 물새 같은 외딸의 혼삿말이 아즈랑/이같이 낀곳은’.

    단 이슬이라는 뜻의 감로는 불교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데, 단 이슬이 샘솟는 명정골은 그에게도 인생의 가르침을 준 곳이었을 것이다. 내 마음과 상대의 마음이 같지 않은 일, 내가 좋아하고 최선을 다해도 닿지 못하는 일이 있다. 그때마다 낡은 사당의 옛 계단에 앉아 있는 백석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명정의 수면을 떠올리며 젊은 청년의 저린 마음을 생각할 것이다. 그의 힘듦을 잠시 빌려 마음을 달래야겠다. 충렬사 입장료 1000원. ☏ 055-645-3229.

    글= 이슬기 기자 good@knnews.co.kr
    사진= 김승권 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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