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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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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8) 인공지능 운영체제와의 사랑-그녀.

  • 기사입력 : 2015-06-26 15:0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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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그녀'를 봤다. 개봉 당시 영화동아리 회원들과의 단체 카톡방에 '좋다'는 평이 꽤 많이 올라와서 궁금했었다.

    하지만 계속 감상을 미뤄왔는데 줄거리가 썩 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운영체제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라니. 현실에 대입한다면 아주 똑똑한 버전의 윈도우와 연애한다는 얘기가 아닌가. 뭔가 영 와닿지가 않았다. 단지 좀 매력적인 부분이 있었다면 핫핑크색 배경의 포스터 정도. 주인공인 호아킨 피닉스의 눈빛도 꽤나 마음에 들었다.

    포스터 색과 대비되는 그의 에메랄드 빛 눈동자가 묘했다. 뭔가 할 말이 있는 것 같은 표정이랄까. 특별히 할 게 없던 밤, 문득 그 포스터가 생각나 영화를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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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오도르의 집. 첨단 기기에 멋진 조망을 갖춘 부족할 것 없는 공간이지만 게임을 하는 그의 모습엔 쓸쓸함이 가득하다.
    테오도르는 어느 미래에 살고 있는 대필작가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음성인식으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시대 정도다. 다른 사람의 편지를 대신 써주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이다. 편지의 내용을 말하면 컴퓨터 화면에 손글씨 형태로 입력된다.

    한쪽 귀에 작은 장치를 꽂으면 어디서나 컴퓨터에 접속할 수 있다. "멜랑콜리한 음악"이라고 말하면 무드에 맞는 음악이 재생되고 "메일"이라고 말하면 (아마도 운영체제가) 새로 온 메일을 읽어준다. 꽤나 하이테크 시대 같지만 그 속의 주인공은 쓸쓸해보인다. 그는 혼자다. 아내와는 이혼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퇴근 후 홀로 집에서 프로젝터 모션 게임을 하는 그의 얼굴엔 공허함이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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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테오도르와 사만다가 교감하는 장면. 사만다는 그에게 직접 작곡한 곡을 들려주며 말한다. "이 곡이 우리에게 사진같은 존재가 됐으면 해요. 우리가 이 시간,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을 담아내고 싶었어요"
    어느 날 그는 이런 광고를 보게 된다. '세계 최초의 인공지능 운영체제. 당신의 말에 귀 기울이고, 당신을 이해하며, 당신을 알아주는, 직관력을 가진, 또 하나의 의식'

    광고에 현혹된 것인지, 그냥 호기심에서인지 어쨌든 그는 인공지능 운영체제를 구매한다. 간단한 질문을 몇 개 받고(사교적인가 비사교적인가, 어머니와의 관계는 어떤가 등) '여성'의 목소리를 선택하자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안녕, 저에요"
     
    그녀는 자신을 '사만다'라고 소개한다. 그녀는 수만명의 프로그래머들의 DNA로 만들어진 존재지만 스스로 생각하고 경험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 존재다. 그녀는 테오도르의 목소리를 듣고 그의 감정을 느끼고 거기에 맞게 반응한다. 사만다는 테오도르가 자신의 말을 듣고 웃음을 터뜨리자 말한다. "재밌었나요? 오, 좋은데요. 제가 재미있다니"
     
    사만다는 점차 '테오도르 맞춤형' 운영체제로 변한다. 그가 아내의 일로 힘들어 할 때 그를 감싸주고 지쳐있을 때 그를 위로해주고 지루할 때는 재치있는 유머로 그를 즐겁게 해준다.

    어느 날 사만다는 테오도르에게 아주 기쁜 소식이 있다고 전해준다. "제가 당신의 편지 중 좋았다고 생각한 것들을 묶어 유명 출판사의 편집자에게 보냈었죠. 오늘 답이 왔는데… 당신과 계약하고 싶대요!" 테오도르가 감격하자 그녀는 말한다. "당신이 기뻐하는 것을 보니 저도 너무 좋아요"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완벽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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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만다와 함께 여행을 온 테오도르. 행복함이 가득하다.
    문득 내 옆에 있는 스마트폰이 눈에 들어왔다. 메르스 여파로 근래 2주간 주말 내내 집에 있으면서 하루종일 만지작거리던 스마트폰. (딱히 약속이나 스케줄이 없어서 집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메르스 예방 차원이었던 것 뿐)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밤에 잠들기 직전까지 함께하는 이 전자기기에게 '인공지능'이 생긴다면 어떨까.

    내가 검색했던 쇼핑 아이템을 보고서 "이런 스타일은 어때요? 당신과 잘 어울릴거에요"라며 추천을 해주거나 "이번주 뉴스를 스크랩해서 모아봤어요. 좋은 제목들에는 밑줄도 쳐뒀고요"라며 업무를 도와주거나 간혹 이런 일도 해줄 것이다. "당신이 배가 고플 거 같아서 치킨을 주문해뒀어요. 오늘 저녁 메뉴가 맛없었다고 했잖아요? 시간이 좀 늦었으니 튀긴 타입이 아니라 구운 타입으로 골랐죠" (아, 상상으로 썼지만…이건 너무 완벽하다)
     
    우리는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는걸까. 눈·코·입도, 몸도 없는, 보거나 만질 수 없는 존재와도 사랑에 빠질 수 있을까.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방과 교감해가는 과정이다. 그래서 내 생각엔 '본다'는 것보다는 '느낀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 사만다는 실체가 없다. 테오도르는 그녀를 볼 수 없지만 느끼고 경험하며 그녀의 존재를 상상해낸다.

    개인적으로 테오도르가 사만다를 사랑하게 되는 과정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자연스럽다고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에게 첫눈에 반하는 타입이 아니라 상대방을 알아갈수록 서서히 좋아하게 되는 타입이라 더욱 그랬을지도.

    언제든 만날 수(접속할 수) 있고 내 얘기를 들어주고 공감해주는 데다 적절한 유머도 구사할 줄 아는 존재라니. 내가 조그만 흰색의 전자기기를 통해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내가 고르게 된다면 '남성'으로 고를 것이므로)에 설렘을 느끼지 않으리란 법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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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만다가 떠난 후 홀로 남게 된 테오도르.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떠나보내면서 자신이 진짜로 사랑하는 법을 알게됐음을 깨닫는다.
    테오도르는 사만다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서 자신이 아내와의 사랑에 실패했던 이유를 깨닫고 그녀와의 '해피엔딩'을 꿈꾸지만 현실은 기대와 다르게 전개된다.

    사만다는 끊임없이 진화해 간다. 테오도르와의 관계를 통해서, 혹은 자체적으로 지식을 습득하면서. 그녀는 사랑뿐만 아니라 매우 다양하고 풍부한 감정을 느끼게 되고 점점 초월적인 존재로 변해간다.

    테오도르는 어느 날 사만다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도 동시에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다. "몇 명이야?" 그녀는 주저하며 답한다. "641명이요."

    그녀는 변했다. 사랑하는 존재가 변한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도 변하고 운영체제도 변한다. 변화는 모든 개체의 숙명이니까. 어떻게, 어디까지 변할지는 알 수 없다. 그것은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이 감당해야하는 일종의 모험이다.

     
    일본에서 세계 최초의 감정인식 로봇 '페퍼'가 등장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사람의 표정과 목소리를 통해 감정을 읽어낸다고 한다. '인공지능 운영체제'는 어쩌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인공지능은 우리의 고독을 얼마나 채워줄 수 있을까. 발전된 기술이 고독을 만들어내고 그 고독을 채우기 위해 다시 더 발전된 기술이 등장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은 언젠가 해결될 수 있을까.

    하지만 아무리 완벽한 운영체제나 로봇이 등장한다고 해도 완벽한 사랑은 쉽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라는 것이 그렇다. 복잡하고도 미묘해서 첨단 기술로도 완벽하게 해석할 수 없는 영원한 미지의 영역. 어쩌면 사랑은 애초에 하이테크나 디지털과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 노래 가사도 있는걸까. 사랑을 쓸려거든 연필로 쓰라고 말이다.
     
    *그동안 영화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번 영화일기는 마지막 편이 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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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영화소개>

    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2013년 작품. '사만다' 역할을 맡아 목소리만 등장하는 스칼렛 요한슨의 압도적인 존재감과 호아킨 피닉스의 섬세한 표정연기가 포인트. 아케이드 파이어가 참여한 o.s.t도 놓치기 아깝다. 존즈 감독은 비스티 보이스, 위저, 다프트 펑크 등 쟁쟁한 뮤지션들의 뮤직비디오를 여러 편 제작한 음악 전문가답게 장면 장면에 딱 맞는 음악을 구현해 낸다. 2014년 아카데미 각본상, 골든 글로브 각본상 수상작. 전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43개의 상을 휩쓸며 호평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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