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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3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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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롱] 일상탐독 (8) 레이먼드 카버/ 대성당

  • 기사입력 : 2015-06-18 14:0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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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년 10월 15일, 나는 낯선 대기 속에 있었다. 낯선 분위기. 낯선 사람들. 낯선 움직임. 그 곳은 분명 낯설었다. 나는 짐짓 쾌활하게 말했다.

    내가 그 곳을 찾아간 이유에 대해. 그들에게서 듣고 싶은 이야기에 대해. 그러나 그들은 미동 하나 없이 각자 앞에 놓인 벽을 향해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면벽수행하는 승려같은 그들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했던 기억. 순간적으로 부닥쳐오던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라는 느낌. 나는 이 낯선 사람들을 어떤 방식으로 대해야 할지 몰랐다.

    눈빛을 교환하고 표정을 살피며 대화하는, 일반적인 소통방식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사실. 그것은 랜턴은 고사하고 촛불 하나 없이 어둔 동굴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듯한 두려움을 안겨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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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전 김유경 기자가 취재했던 점자도서관 '스마트기기 수업' 사진
    그들은 보고 있지 않았다. 다만 듣고 있었다. 경청하고 있었다. 내 코를 드나드는 들숨과 날숨을, 빨라졌다 느려졌다 하는 걸음걸이를, 가방을 내려놓거나 펜 뚜껑을 여는 자잘한 움직임들을. 그랬다.

    그들은 앞을 볼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날은 세계맹인연합회가 제정한 '흰지팡이의 날'이었고, 나의 임무는 점자도서관을 찾아 맹인들이 처한 열악한 교육환경을 취재하는 거였다.

    도내에 무려 1만7000여명의 시각장애인이 있다는 것. 도내 공공도서관 58곳 중 장애인 자료실이 있는 곳은 20곳에 불과하다는 것. 도내에 하나 뿐인 점자도서관도 운영비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 등등. 그날 취재를 통해 새롭게 알게된 것들이었다.


    '그러니까 맹인이, 아내의 오랜 친구가 하룻밤 묵기 위해 찾아오고 있었다. 그가 기차를 타고 오면, 아내는 역에서 그를 맞이할 예정이었다.

    십 년 전 여름, 시애틀에서 그를 위해 일한 뒤로 그녀는 한 번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와 맹인은 계속 연락하고 있었다. 그들은 말로 녹음한 테이프를 우편으로 주고 받았다. 내게는 그의 방문이 달가울 리 없었다. 나로서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눈이 멀었다는 사실도 마음에 걸렸다.

    … 그해 여름 시애틀에서 아내는 신문에서 다음과 같은 것을 읽게 됐다. '구인-맹인에게 책 읽어주는 일'과 전화번호. 그녀는 전화한 뒤에 찾아갔고, 그 자리에서 채용됐다. 그녀는 여름 내내, 그러니까 맹인과 일한 것이다. 그녀는 그가 맡고 있던, 카운티 사회복지국 내 작은 사무실의 운용을 도왔다.

    나는 어떻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는가? 그녀가 내게 말해줬다. 또다른 이야기도 들었다. 사무실에서 일하던 마지막 날, 맹인은 얼굴을 만져봐도 되는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승낙했다. 그녀는 내게 그가 손가락으로 얼굴의 모든 부분을, 코를 만졌다고 말했다. 심지어 목까지도! 심지어는 그 일에 관한 시까지 쓰려고 했다.

    우리가 서로 사귀기 시작할 무렵, 그녀는 내게 그 시를 보여줬다. 그 시에서 그녀는 그의 손가락들과, 그리고 그 손가락들이 자기 얼굴 위에서 어떻게 움직였는지 떠올렸다. 그 시에서 그녀는 그때 자신이 무엇을 느꼈는지, 그 맹인이 코와 입술을 만졌을 때 마음속으로 무엇이 지나갔는지 말하고 있었다.' - 문학동네/레이먼드 카버/'대성당' 288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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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2년이 지난 지금, 기억 깊숙히 남아 있는 장면들은 기사에 썼던 그런 이야기들은 아니다. 두꺼운 헤드셋을 한겨울의 목도리처럼 목에 두르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귀를 갖다대던 무표정한 얼굴들. 그들은 점자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스마트기기 수업을 들으러 온 시각장애인들이었다.

    그들은 아이패드 다루는 방법을 익히고 있었고, 내가 찾아간 날이 세번째 수업이 있는 날이라고 했다. 쏟아지는 첨단기술의 수혜에 시각장애인들도 예외일 수는 없는 거였다. 아이패드 수업의 궁극적 목적은 '카카오 톡'을 이용해 대화를 나누는 것.

    스마트폰보다 표면적이 넓은 아이패드로 문자판 사용을 익힌 뒤, 스마트폰으로 '카카오 톡'을 다룰 계획이라고 했다. 그들은 내 보는 앞에서 손가락으로 스크린을 열심히 두드리며 뭔가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정적 속에 톡톡, 소리만 울려펴졌다.

    이들을 가르치던 자원봉사자가 애국가 작성이 이날 부과된 과제라고 알려줬다. 애국가 1절~4절에는 자음과 모음을 결합해 만들어낼 수 있는 한글 조합이 모두 들어 있어 자판 익히기에 좋은 교본이 되기 때문이었다. 나는 조용히 그들의 등 뒤로 다가가 스크린을 슬쩍 넘어다 봤다. 거기엔 오타투성이 애국가 몇 소절이 쓰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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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인의 아내는 죽었다. 그녀의 이름은 뷰라였다. 뷰라는 아내가 일을 그만둔 그해 여름부터 그 맹인을 위해 일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뷰라와 맹인은 교회에서 두 사람만의 결혼식을 올렸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뷰라의 임파선에는 암세포가 자라고 있었다. 두 사람이 팔년 동안 찰떡같이 붙어다닌 뒤 뷰라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졌다. 그 맹인이 병상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꽉 잡고 있는 동안, 시애틀의 한 병실에서 그녀는 숨졌다. 그 박복한 여자가 어떻게 생겼는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채로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난 것이다.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선을 넘어선 이야기였다. 여기까지 듣게 되자, 맹인이 약간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살았을 삶의 행로가 얼마나 가엾은 것인가를 생각하게 됐다.

    사랑하는 사람의 눈 속에 비친 자신을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여인을 상상해보라. 사랑하는 남자에게 지나가는 말이라도 예쁘다는 칭찬을 듣지 못한 채 하루하루 살아가야만 하는 여자. 화장을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겠으나 그게 그 사람에게 무슨 차이가 있을까?

    그러다 죽음 속으로 빠져들던 그 순간, 그녀의 손 위엔 그의 손이, 그의 먼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을 것이고 그녀의 마지막 생각은 이랬을 테지. 이 사람은 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데 나는 무덤으로 직행하고 있다고.' - 문학동네/레이먼드 카버/'대성당' 293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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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잊고 있었던 그날의 기억을 다시 떠올린 건 최근의 일이다. 정확히 말하면 2주 전 S를 만나고부터. S는 경남신문사가 동참하고 있는 사회사업 '사랑의 각막이식 수술' 혜택을 받아 새로운 삶을 살게 된 60대 남성이다.

    나는 그의 과거와 현재를 인터뷰했다. 선천적으로 미성숙한 수정체를 갖고 태어나 평생을 고생한 일, 시력을 완전히 잃은 뒤 10년 동안 방 안에 틀어박혔던 날들, 그러다 컴퓨터 수업을 통해 또다른 세상을 만난 것, 장애인협회 홈페이지에서 무료각막이식 수술 사업을 접했던 기적같은 일 등등.

    각막을 이식받은 후 눈 상태가 호전된 그는 동료 시각장애인들의 집에 일일이 방문해 컴퓨터를 가르치고 있었다. 한글, 엑셀, 포토샵 등을 가르치고 인터넷 사용법도 가르친다고 했다. 이들 대부분이 형편이 좋지 않아 수업을 갔다가 밥을 사먹이고 오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했다.

    S는 말했다. "전혀 보이지 않는 1급 시각장애인들이 컴퓨터를 어떻게 다루는지 아십니까? 기자님이 오늘부터 모니터 없이 컴퓨터를 사용한다고 상상해 보세요. 불가능하겠죠? 하지만 이 사람들은 본체와 키보드면 됩니다. 보이지 않기 때문에 보여지는 도구는 필요 없지요. 음성인식을 이용해 글을 읽고 키보드를 이용해 문서를 작성하지요. 시각장애인들의 사이버 공간은 가시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들 머리속에 만들어져 있습니다. 이해가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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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을 못 보는 사람을 내가 개인적으로 알거나 만나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갈색 슬랙스에 갈색 신발, 밝은 갈색 셔츠, 넥타이, 스포츠 재킷을 입고 있었다. 덥수룩한 수염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지팡이를 사용하지 않았고 검은 안경을 쓰지도 않았다. 나는 항상 맹인들에게는 검은 안경이 필수품이라고 생각했다. 처음 봤을 때, 그의 눈동자는 다른 사람들의 눈동자와 비슷했다. 하지만 가까이 살피면 뭔가 다른 점이 보였다. 일테면 홍채에 흰색이 너무 많았고, 동공은 목적이 없는 것처럼 혹은 멈출 능력이 없는 것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 맹인과 아내는 소파에 앉았다. 나는 큰 의자를 차지했다. 우리가 두세 잔의 술을 마시는 동안 두 사람은 지난 십 년 동안 자신들에게 발생한 큰 일들에 대해 얘기했다. 가끔씩 나도 끼어들었다.

    내가 방을 떠났으리라고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게 싫었고, 내가 소외됐다고 아내가 생각하는 것도 싫었다. 그들은 지난 십년간 그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얘기했다.

    … 어느새 아내는 입을 벌린 채 소파에 머리를 대고 잠들었다. "힘드신가요? 침실까지 모시고 갈까요?" 내가 물었다. "아직은 아닐세. 젊은 양반. 괜찮다면 말이야. 자네가 잠자리에 들 때까지 나도 깨어 있겠네." 맹인이 말했다. TV에서는 교회와 중세에 관한 프로그램이 나오고 있었다. TV에서 흔히 보는 볼거리는 아니었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몸을 앞으로 기대고 머리를 내 쪽으로 둔 채 TV를 향해 오른쪽 귀를 내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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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V에 이제 대성당이 하나 나왔다. 그러더니 오랫동안 천천히 또다른 성당을 보여줬다. 마침내 화면은 버팀도리와 구름에 닿을 듯 치솟은 첨탑이 있는, 파리의 그 유명한 대성당으로 바뀌었다.

    해설자가 말을 멈춘 동안, 카메라가 대성당을 굽어보며 그 주위를 비추기도 했다. 나는 뭔가 말해야만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대성당 외부를 부여주고 있어요. 괴물처럼 만들어서 깎아놓은 조각상들이 있어요." … "대성당이라." 맹인이 말했다. "이보게, 솔직히 말하면, 방금 들은 것들 밖에 나는 몰라. 하지만 자네가 설명해줄 수는 있겠지. 솔직히 나는 감이 없다네."

    나는 TV 화면의 대성당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먼저 대성당은 아주 높습니다. 위로 치솟았어요. 높이, 아주 높이. 지지물을 만들어 놓은 대성당도 있어요. 여러모로 고가다리 같다는 느낌이 들어요. 하지만 고가다리도 모르시겠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명이 잘 안 되네요, 그렇죠?" 내가 말했다. 설명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는 걸 난 알 수 있었다. "대성당은 정말 큽니다. 어마어마해요. 돌로 만들었죠. 때로는 대리석으로도요.… 죄송합니다. 이정도로밖에는 제가 할 수 있는 설명이 없겠습니다. 이런 일은 잘 못하겠습니다."'- 문학동네/레이먼드 카버/'대성당' 307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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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가 가냐고?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사실 그건 내가 수용할 수 있는 이해도를 벗어난 것이었다. 사이버 공간 자체가 이미 실체가 없는데, 그 없는 실체가 더더욱 없어져 그들의 머리속에만 존재한다고? 참으로 철학적이면서도 사변적이기도 한 이야기였다.

    그때 알았다. 우리 곁에 살고 있는 1만7000명 시각장애인들 모두는 제각각으로 생긴 1만7000개의 세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세계에 우리는 제대로 초대받은 적이 없고, 초대 받았다하더라도 제대로 방문한 일도 없다는 것을. 지면에 나간 기사에는 S가 들려준 많은 이야기를 실었지만, 정작 내 마음에 큰 인상을 남긴 이야기는 따로 있었다.

    인터뷰 말미에 S가 푸념을 섞어 내뱉은 하소연이었다. "시각장애인들은 눈이 안 보이는 대신 손의 감각이 예민하게 발달해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을 만나면 손으로 얼굴을 더듬고 허리를 껴안아 그 사람의 안부를 묻지요. 상대방이 고생을 한 것은 아닌지, 몸은 건강한지 알고자하는 관심이지요. 인사법입니다. 하지만 일반인들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자세히 알아보지도 않은 채 불쾌해하고 심지어 성추행이라 몰아세우는 일도 있습니다. 서로 다른 것일 뿐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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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그때 맹인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런데 말이야. 내 부탁 좀 들어주겠나? 좋은 생각이 났어. 좀 두꺼운 종이를 가져오겠나? 펜이랑. 우리 뭘 좀 해야겠네. 같이 하나 그려보자구. 자. 이 사람아, 어서 가져오게나." 그가 말했다. 나는 물건들을 치우고 다탁 위에 종이를 펼쳤다.

    그는 내 손, 펜을 쥔 손을 찾았다. 그는 내 손 위에 자기 손을 얹었다. "시작하게나. 이 사람아, 그려봐." 그가 말했다. "뭘하자는 건지 알게 될거야. 내가 자네 손을 따라 움직이겠네. 괜찮아. 그려봐." 그래서 나는 그리기 시작했다. 먼저 집처럼 생긴 네모를 하나 그렸다. 그 위에 지붕을 얹었다. 지붕의 양쪽 끝에다가 나는 첨탑을 그렸다.

    "멋지군." 그가 말했다. "자네 인생에 이런 일을 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겠지. 그렇지 않나, 이 사람아? 그러기에 삶이란 희한한 걸세, 잘 알다시피. 계속해. 멈추지 말고." 나는 아치 모양 창문들을 그렸다. 나는 버팀도리를 그렸다. 나는 큰문들도 만들었다. 멈출 수가 없었다. TV 방송은 끝났다.

    나는 끈덕지게 그렸다. 나는 그림 실력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묵묵히 계속 그렸다. … "이제 눈을 감아 보게나." 맹인이 내게 말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그가 말한 대로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멈추지 말고 그려." 그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살아오는 동안, 내 인생에 그런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해낸 것 같아." 그는 말했다. "한 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렇게 눈은 감은 채로 있자고 나는 생각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어때?" 그가 물었다.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 안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나는 말했다.' - 문학동네/레이먼드 카버/'대성당' 311페이지


    S를 만나고 돌아온 날, 나는 2년 전 점자도서관에서의 일을 떠올렸다.

    나는 거기서 무엇을 했던가? 그날 오후 취재가 모두 끝난 뒤, 나는 시각장애인들에게서 헤드셋을 빌려 끼고 아이패드가 놓인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두 눈을 감았다. 경. 남. 신. 문. 이 4글자를 아이패드에 써보기로 했다. 컴퓨터 자판이 올록볼록한 요철이 있는 '잔디밭'이라면 터치스크린은 쉽게 미끌어지는 '빙판'이었다.

    조금만 잘못하면 지금까지 작성한 글 전부가 엉망이 되어버리기 일쑤. 아니, 솔직히 말해 대체 내가 뭘 만지고 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당장 눈을 뜨고 싶어 두 눈 언저리가 움찔거렸고 손에선 진땀이 났다. 참다못한 내가 끙끙대는 소리를 내자 시각장애인들이 재밌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장장 30분이 지나도록 나는 '경남신문' 4글자를 제대로 쓰지 못했다. 결국 포기했다. 고작 30분이었지만 분명 나는 전혀 다른 공간에 들어갔다 나온 거였다. 그 곳이 바로 그들의 공간, 심해처럼 깊고 어둡고 무한하며 그렇기에 바짝바짝 조바심이 나는 세계였다.

    자원봉사자는 말했다. 6개월 정도 훈련을 하면 시각장애인들 모두 '카카오 톡'으로 충분히 대화가 가능하다고. 그들은 그 날만을 고대하고 있다고. 다만 새로운 기술의 사용법을 익히고 나면 그것을 다 펼쳐보기도 전에 또다른 기술이 만들어지고, 이를 다시 습득해야 하는 것에 힘겨워한다고 했다.

    교신을 기다리는 1만7000개의 세계. 교신 방법의 변천이 너무 빨라 힘겨워하는 1만7000개의 세계. 볼 수 있는 이들과 볼 수 없는 이들의 세계가 만든 간극. S를 만나고 돌아온 날 밤, 나는 그 간극 안에 홀로 바람을 맞으며 서 있다는 이상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혹시 2년 전 그들은 그들의 세계로 나를 정중히 초대했던 것이 아닐까. 내가 하는 말과 행동 하나하나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이는, 아이패드도 카카오 톡도 필요없는 아주 고전적인 교신방법을 이용해서 말이다. 나야말로 두 눈이 모두 멀어버린 사람처럼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것이 아닐까. 이미 오래 전 발치에 당도해 있는 그들의 초대장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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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먼드 카버(Raymond Carver)는 1938년 미국 오리건 주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제재소 노동자, 병원 수위 등을 전전하며 힘겨운 삶을 살았고, 젊은 시절엔 알콜 중독으로 고생했다.

    몇차례에 걸친 파산으로 경제적으로 힘겹게 살았지만 끝까지 글쓰기를 포기하지 않았다. 1983년 출간한 '대성당(Cathedral)'은 주인공 아내의 맹인친구가 주인공의 집을 방문해 머무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주인공은 맹인의 등장을 시종일관 탐탁치 않게 여기다가, 엉겁결에 TV에 나오는 대성당에 대해 맹인에게 설명해주기 시작하면서 그를 깊이 공감하게 된다.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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