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20일 (토)
전체메뉴

[열린포럼] 욕쟁이 할머니는 지지 않아요- 김지율(시인)

  • 기사입력 : 2015-06-09 07:00:00
  •   
  • 메인이미지

    단골 선지 국밥집이 있다. 욕쟁이 할머니집이다. 할머니는 욕이 입에 착착 감긴다. 말의 반이 욕인 당신의 말은 발음이 강한 터키말 같다.

    할머니를 알게 된 건 20년 전의 일이다. 제일 친한 친구가 여기서 아주 먼 나라로 이민을 가기 전날이었다. 같이 지리산 천왕봉을 오르고 난 뒷날이었을 거다. 아침에 국밥을 먹으며 같이 울었던 거 같고, 그녀에게 다시는 이 지긋지긋한 나라에 오지 말라고 했던 거 같다. 친구를 보낸 뒤 슬픔의 유통기한은 생각보다 길었고 정말 그녀는 한국에 영영 오지 않았다.

    일 년에 몇 번 국밥집엘 간다. 많이 아프고 난 다음 날은 어김없이 그것이 생각난다. 청승은 혼자 처리하라는 듯 당신은 또 나를 욕한다. 어느 날 계란을 묻혀 갓 구운 밀가루 소시지를 밑반찬으로 주었다. 밀가루 맛도 소시지 맛도 아닌 큰 분홍색의 소시지를 한 입 먹는 순간, 나는 당신이 몇 배로 더 좋아졌다. 퍽퍽한 선지의 맛은 숱한 몸살의 시간들을 지나고 느끼는 진한 피의 맛이다. 더 많이 아픈 사람이 알고도 모르는 척, 아프면서 안 아픈 척 건네는 순정의 맛이다. 물어볼 힘도 대답할 힘도 없을 때 그 지독하고 느린 고요를 처음부터 끝까지 참아야 하는 순한 피의 맛이다.

    다니자키 준이치로는 <음예예찬>에서 국그릇을 들었을 때 ‘손바닥으로 느끼는 무게의 감각과 따뜻한 온기, 그것은 갓 태어난 아기의 포동포동한 몸을 떠받치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던가. 따뜻한 국그릇을 손으로 잡고 당신의 얼굴을 닮은 숟가락으로 국물을 들이켜면 속을 제대로 데우는 것 같다. 불안이나 슬픔이 제 자리를 찾지 못해 빙글빙글 돌고 있을 때 그것들을 데려와 같이 밥을 먹이면 한동안 잠잠해진다. 당신의 고집과 퉁명스런 욕이 들어간 국밥은 세상의 화려하고 비싼 음식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맛이다. 가게 앞 아주 큰 알루미늄 솥에는 콩나물과 무를 넣은 선짓국이 하루 종일 끓고 있다. 테이블 네 개가 고작인 작고 낮은 가게에서 40년 동안 당신이 이렇게 먹인 단골은 얼마나 될까.

    얼마 전 동네 목욕탕에서 당신과 마주쳤다. 탕에 앉은 당신은 허리와 다리가 심하게 아파 장사가 힘에 부친다고 했다. 서로의 등을 밀고 밀면서 당신은 또 욕을 했고 많이 먹고 씩씩해야 한다고 했던가.

    내가 쓰는 글들은 누군가에게 일말의 힘이 될 수 없지만 조미료를 넣지 않은 당신의 국밥은 팍팍한 이 세상의 누군가에게는 4500원보다 몇 배의 위로이고 힘이다.

    할머니의 선지국밥과 욕이 나에게 왜 힘이 되고 위로가 되는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살아 있는 시간, 살아가는 시간은 길이의 문제가 아닐 것이다. 몸으로 하는 욕의 화살이 엄살로 건사하게 치장하려는 내 허영을 정확하게 꿰뚫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당신을 만나고 나는 조금씩 변전(變轉), 또 변전해 가고 있다.

    진한 갈색의 선지와 분홍색 혀, 근원과 저항의 힘이 늘 연대하면서 존재는 구심과 원심의 힘으로 움직인다. 그러므로 죽음과 삶은 다른 혹은 같은 뿌리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세상의 편견과 소통 그리고 내가 한 번도 반성해 보지 않고 지나온 지금도 지나가고 있는 힘든 당신들과 오늘은 따뜻한 선지국밥을 먹고 싶다.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금방 울 것 같은’ (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중)

    김지율 (시인)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