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9일 (금)
전체메뉴

[길.예.담] (1) 영화 '밀양'의 기회송림길

‘비밀스런 빛’이 소나무와 하나가 돼 걷는다

  • 기사입력 : 2015-06-04 22:00:00
  •   
  • 메인이미지
    영화 ‘밀양’의 촬영지인 밀양 기회송림에서 이슬기 기자가 솔밭길을 걷고 있다./김승권 기자/
    ‘길·예·담’은 이야기입니다. 우리의 삶과 애환이 담긴 길, 그 속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담으려 합니다.

    사람과 사람,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정이 넘치는 길. 기쁨도 슬픔도 함께하며 삶의 터전이 되어준 길. 많은 것을 품고 있지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길에 의미를 부여해 봅니다.

    오선지 위에 그려진 음표에 영감을 준 길, 화폭 속 그림의 주인공이 된 길, 시 구절과 영화 속 아름다운 길이 우리들 기억에서 사라지기 전에 ‘길·예·담’이 품으려 합니다.

    발길이 닿는 대로 길을 따라가다 보면 사람냄새 풍기는, 옛정이 넘치는 정겨운 길을 만나기도 하겠지요. 그 길을 따라 이제 떠나 봅니다.

    메인이미지
    영화 '밀양'의 촬영지인 밀양 기회송림에서 문화부 이슬기 기자가 솔밭길을 걷고 있다./김승권 기자/
    빛과 나무의 교집합들이 바닥에 깔려 있고, 길게 뺀 목들이 저마다의 하늘을 바라보고 서 있다. 사계절 초록인 나무들 곁에 서서 나무들처럼 하늘을 올려다보고 걸을 준비를 한다. 밀양시 산외면에 있는 기회송림유원지. 이곳은 지난 2007년 개봉한 영화 ‘밀양’의 배경이 된 곳 가운데 하나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남편의 고향 밀양으로 내려온 신애(전도연 분), 그녀는 밀양의 지명을 ‘비밀스런 빛’이라고 정의하며 아들과 함께 논둑에 앉아 밀양의 햇빛을 즐긴다. 그녀는 이곳에서 피아노 학원을 꾸리며 살아나가지만 아들 준이마저 납치살인으로 잃게 된다.

    캄캄한 집에 들어앉아 괴로워하던 신애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서 마음의 평안을 찾고, 살인범을 용서할 용기까지 내 구치소에 찾아간다. 그러나 이미 감옥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다는 살인범의 편안한 모습에 충격을 받고, 신애는 하나님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며 반항을 시작한다.
    메인이미지
    신도야외집회 장소로 기회송림이 나오는 영화 ‘밀양’의 장면.
    기회송림은 영화에서 하나님에 대한 분노, 그리고 신도들에 그것을 알리려는 장소로 등장한다. 신애가 다니던 교회는 이곳에서 신도야외부흥회를 여는데, 목사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해 설교하고 신자들이 은혜에 감사해하고 있을 때, 신애는 몰래 음향기기에 다가가 음반매장에서 ‘훔친’ CD를 튼다. 송림에는 김추자의 ‘거짓말이야’가 울려퍼진다. 신애는 그제야 속이 풀린다는 듯 가슴을 두드리며 하늘을 사납게 째려보고선 기회송림유원지 입구를 나선다.

    평일 낮에 기회송림을 찾았다. 유원지 입장료 1000원을 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가 보니 설교말씀과 노래가 울려퍼졌던 영화 속 장면과 달리 사방이 조용하다. 인디언 추장 깃털 머리모양을 닮은 새 ‘후투티’ 가족들이 소나무에 앉았다, 땅에 내려앉았다 날갯짓을 반복하는 소리만 들린다. 인기척을 냈더니 재빨리 몸을 숨기려는 청설모가 보이고, 발자국 소리가 요란하다.

    긴늪숲유원지라고도 불리는 기회송림에는 4500여 그루의 소나무가 있다. 요즘은 행정구역상 ‘기회’라고 돼 있는 이 동네는 예로부터 ‘긴늪’이라 불렸다. 강주변 물이 늘 넘치는 늪지대로 논밭을 일구기도 어려웠던 곳이었다. 그러다 140여년 전, 마을 사람들이 바람과 물을 막기 위해 소나무를 심었던 것이 숲을 이뤘다.

    입구에서 조금 더 걸어 들어가 보니 오른편에 어릴 적 타고 놀던 트램펄린과 오래돼 보이는 매점이 나란히 자리한다. 왼편에는 족구장이 보이는데 여기가 영화 속에서 부흥회가 열렸던 장소라고 한다.
    메인이미지
    영화 '밀양'의 촬영지인 밀양 기회송림./김승권 기자/
    영화 속 신애가 기도하는 신도들을 노려보던 길을 따라 타박타박 걸어가다 보면 나무 한 그루 한 그루가 눈에 들어온다. 구부러진 나무기둥들이 사람 인(人) 자로 겹쳐 있어 길의 시작을 알리는 문과 같아 보인다. 이들을 지나치면 척 봐도 수령이 꽤 돼 보이는 나무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고, 바깥쪽으로는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꼬마 나무들이 보인다.

    “예전에 숲이 가장 울창했을 때는 9000그루까지 됐는데, 2003년인가 태풍 매미 때 상부 쪽 나무 1000그루 이상이 비바람에 쓰러졌어요. 일부 나무는 죽기도 하고요. 그 이후 계속 중간중간 다시 심어서 지금은 4000~5000그루 정도 있습니다.” 이 숲길의 내력이 궁금해 물었더니 기회동 박수목(49) 이장이 설명해준다.
    메인이미지
    영화 '밀양'의 촬영지인 밀양 기회송림에서 문화부 이슬기 기자가 솔밭길을 걷고 있다./김승권 기자/
    1km 남짓한 숲길은 밀양강 상류와 머리를 맞대고 있다. 길이가 짧고, 걷는 길이 따로 조성된 것은 아니어서 올레길처럼 운동을 위한 곳은 아니다. 하지만 사람이 거의 없어 조용하고 솔잎 위를 걷는 기분이 포근하다. 또 강을 끼고 있어 걷다 보면 송림 안에서도 제방 너머의 물반짝임이 보여 산속에 있는 송림과는 또다른 매력이 있다.

    동이 트는 새벽 어스름 때와 노을의 붉은 빛이 강물에 닿을 때는 더 그렇다. 강가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 내려가봤다. 지금은 강이 메말라 흰 돌들과 풀들이 듬성듬성하고, 숲 건너편 쪽으로만 물이 흐르고 있다. 곧 다가올 여름이면 이내 물이 가득차 숲길 바로 옆에서 물놀이를 즐길 수 있다. 아직은 말라 있는 돌 위에 흰 나비가 날고, 꼬마 물떼새가 둥지를 지키기 위해 다른 곳으로 사람을 유인하는 소리를 냈다. 영화 속 준이를 지키려 했던 신애의 모습이 스쳐간다.
    메인이미지
    영화 '밀양'의 촬영지인 밀양 기회송림 앞으로 밀양강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다./김승권 기자//
    메인이미지
    영화 '밀양'의 촬영지인 밀양 기회송림 앞으로 밀양강이 시원하게 흐르고 있다./김승권 기자/
    원래도 밀양시민의 사랑을 받던 유원지는, 영화를 찍고 나서 더욱 북적였다. 영화는 실제로도 대부분 밀양에서 촬영했는데, 신애 역을 맡은 배우 전도연이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이후 ‘밀양’ 촬영지 곳곳을 돌아보는 관광객들이 늘어난 덕분이다. 지금은 캠핑 붐을 타고 야영을 즐기는 사람들이 자주 찾는다. 그러고 보니 조용한 평일 낮 솔밭에서 여유를 즐기는 텐트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메인이미지
    소나무 숲길장 한 바퀴를 돌고 나서 하늘색 철문을 나서기 전, 원망스런 하나님을 쏘아올려봤던 신애처럼 하늘을 올려다본다. 오후 4시, 밀양이란 이름이 섭섭지 않게 강렬한 햇빛이다. 영화가 끝날 무렵 신애는 계속 그녀의 주변을 귀찮으리 만큼 맴돈 카센터 사장 종찬(송강호 분)에게 더 이상 핀잔을 주지 않는다. 결국 꾸준히 내리쬐는 빛을 구원으로 인정한 것처럼 보인다.

    빛을 보고 다시 송림을 본다. 내리쬐는 햇빛에 소나무 그림자가 진다. 심보선은 시 ‘체념’에서 ‘그림자는 태양이 사물을 영원히 주시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썼다. 멈추지 않는 빛의 관심, 사랑받는 기분이 든다. 냉랭했던 신애의 집에 볕이 드는 마지막 장면이 겹친다. 마음이 차가워질 때마다 이 길이 생각날 것이다.

    이슬기 기자 good@knnews.co.kr


    ▲밀양 기회송림야영장- 밀양시 산외면 남기리 1073-23

    -주차요금 3000원/입장료 1000원(성인 기준)

    ▲영화 ‘밀양’- 이창동 감독/141분/15세 관람가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이슬기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