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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6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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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일기 (5) 현기증- 편집의 힘이 만들어낸 걸작

  • 기사입력 : 2015-04-30 13:2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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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스터리한 배경음악이 나오면서 흑백화면 가득히 여인의 입술이 클로즈업 된다. 순간 잔잔하던 음악이 강렬해지면서 남자 주인공의 이름이 나온다. '제임스 스튜어트'. 카메라는 천천히 여인의 코를 지나 두 눈으로 향한다. 화면을 가득 채운 여인의 두 눈은 불안한 듯 시선이 좌우로 흔들린다. 여자 주인공의 이름이 나온다.

    '킴 노박'. 카메라는 다시 서서히 움직이며 여인의 왼쪽 눈을 비추고 여기서 감독의 이름이 등장한다. '알프레드 히치콕'. 그 다음에 화면은 갑자기 온통 붉은 색으로 물든다. 여인의 눈동자가 불안한 듯 크게 팽창하며 영화 제목이 서서히 화면 위로 떠오른다. '현기증(vert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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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현기증'의 도입부.>

    오랜만에 히치콕 감독의 '현기증'을 봤다. 현기증의 도입부를 특히 좋아한다. 이 영화의 매력은 무척이나 많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도입부라고 생각한다. 이제까지 여러 영화를 봐왔지만 도입부가 이만큼 매력적인 영화는 찾지 못했다. 대학시절 처음 봤을 때도, 지금도 여전히 첫 화면부터 시선을 사로잡힌다.

    현기증은 대학에서 영화관련 수업을 들으면서 '싸이코'를 본 후 히치콕 감독에 흥미가 생겨 찾아본 영화다. 도입부가 어찌나 강렬했던지 영화에 흠뻑 빠져서 봤던 것은 물론이고 제임스 스튜어트와 킴 노박도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제목이 나온 후 붉은색 화면 속 여인의 눈동자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는 작은 회오리 모양이 등장한다. 회오리는 점점 커지면서 화면을 압도하고 회전하면서 형태나 크기가 바뀐다. 그 동안 자막으로 계속 등장인물과 스태프가 소개된다. 3분 남짓한 이 영상에 완전히 반해 히치콕 감독의 열렬한 팬이 됐다.
     
    편집을 시작한 후로 히치콕의 영화를 자주 꺼내 본다. 히치콕은 "편집만으로 감정(서스펜스)을 창조했다"고 평가받는 감독이다. 특히 첫 장면부터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현기증의 도입부는 편집의 롤모델이면서 동시에 자극제가 된다.

    다음 달이면 어느덧 편집기자 생활을 한지 2년이다. 수습시절 3개월을 빼면 실전에서 일한 건 20개월 정도. 보통 하루에 지면을 2개씩 제작하고 지면 1개당 평균 5개 정도 기사의 제목을 쓴다고 생각하면 하루에 10개 정도의 제목을 쓴다. 여기에 일하는 날짜를 곱해 계산해보면 1달이면 200개, 1년이면 2400개 정도의 제목을 뽑아낸 셈이다.

    수백 장의 지면을 제작하고 수천 개의 제목을 뽑아내는 동안 나는 얼마나 사람들을 사로잡았을까. 제목이나 디자인에 반해 기사를 모두 읽어 보게 만든 적이 있을까. 곱씹어 보면 딱히 내세울만한 게 없다.(갑자기 짜게 식어버리는 느낌이 든다.)

    항상 재미있는 제목을 달고 싶다, 독특한 디자인을 해보고 싶다고 애써 보지만 결국 손에 쥐고 있는 건 매번 뻔한 제목과 스타일이다. 신문편집을 하면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자 진리가 있다면 "내가 아는(하는) 것은 남들도 다 알고(하고) 있다"는 것이다. 2년이라는 시간도, 5000개에 육박하는 제목도 씁쓸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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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카티가 매들린을 따라 교회의 종탑을 올라가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순간.>

    나와는 다르게 히치콕 감독은 자신의 거의 모든 작품들 속에 '끝내주는' 장면을 만들어 냈다. 그가 가진 무기는 단순했다. 카메라 워크와 편집. 영국 출신의 영화평론가 로빈 우드는 영화의 가장 본질적 수단들을 활용해 만든 그의 영화를 일컬어 '순수 영화'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남자 주인공 스카티가 현기증을 느끼는 장면은 도입부만큼이나 인상적이다. 지붕위에서 범인을 추격하던 중 미끄러져 파이프에 간신히 매달린 채 바닥을 내려다보는 순간, 카메라는 실제보다 훨씬 더 과장된 깊이감을 보여준다. 교회 종탑에서의 추격신도 마찬가지다. 스카티가 여자 주인공 매들린을 쫓아 나선모양의 계단을 따라 올라가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장면은 관객들에게 실제로 현기증을 느끼게 한다.
     
    신문이 쇠퇴하는 만큼 신문 편집도 점점 설자리가 좁아진다. 많은 사람들이 그래픽 같은 시각적 효과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간혹 제목과 레이아웃(편집 디자인)만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긴 이토록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그래픽 같은 '첨단 무기'는 어쩌면 생존을 위한 필수 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히치콕의 영화를 볼 때면 여전히 제목과 레이아웃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믿음이 생긴다. 그가 특수효과나 기술이 없이도 잊을 수 없는 장면을 만들어냈던 것처럼 나도 제목과 레이아웃만으로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기억될 수 있을 거라고 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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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카티가 꿈속에서 죽은 매들린이 겪었던 환각을 그대로 느끼는 장면. 초상화 속 여인이 꿈속에 등장한다. 화면이 다양한 색으로 변주되며 그의 불안정한 심리상태를 생생하게 표현한다.>

    히치콕의 영화를 보고난 후 감탄하고 있노라면 그가 이렇게 물어오는 것 같다. '너는 누군가에게 한번이라도 강렬했느냐'. 거장의 압도적인 위엄 앞에서 현실을 마주할 때면 한없이 쭈그러드는 나를 발견하지만 속으로 소심하게 변명을 해본다. '그게 좀…아직은 아닌데 언젠가는 가능할 겁니다. 애쓰다보면 저도 한 번쯤은 끝내주는 걸 만들 수 있지 않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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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단영화소개>
    스릴러 장르의 1인자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1958년도 작품. '싸이코'와 함께 히치콕 감독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자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수많은 평론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영화'로 꼽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성격이 크게 달라진다는 점이 독특하다. 죽은 매들린에 대한 스카티의 연정이 주디라는 여인에 대한 강박증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담았다. 스릴러지만 로맨스가 혼합된 '로맨스릴러' 장르의 영화. 아름다운 킴 노박을 감상하는 즐거움은 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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