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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1) 독수기치(獨樹旗幟)- 혼자 깃발을 세우다. 독창적인 의견을 내놓다

  • 기사입력 : 2015-04-28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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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은 유교 국가이다. 조선에서 말하는 유교는 곧 주자학(朱子學)이다.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유교경전을 주자의 관점에서 해석한 유학이다.

    주자의 해석에서 조금만 어긋나도 사문난적(斯文亂賊)으로 몰아 처단했다. 백호(白湖) 윤휴, 서계(西溪) 박세당 등이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의 학설과 어긋났다 하여 결국 몰려 죽임을 당하거나 유배생활을 했다.

    조선시대는 학문적 자유가 있다고 말하기 힘들고 오로지 주자의 학설을 그대로 충실히 따르는 것을 학문한다고 했던 것이다. 새로 변하는 것을 수용하지 않고 아예 막아버렸다. 이런 분위기는 조선 말기까지 지속됐다. 그러다가 나라가 망했다.

    뜻있는 선비들이 나라를 되찾을 방안을 찾아 나섰다. 나라 안에서 독립운동에 종사하는 분이 있었고, 중국에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세운 분들도 있었다. 멀리 미국에서 우리나라의 사정을 해외에 알린 분들도 있었다.

    이런 가운데 함양(咸陽)에서 태어난 진암(眞庵) 이병헌(李炳憲 1870~1940) 선생은 유교의 개혁을 시도하여 공자교(孔子敎)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유교를 종교로 보았는데, 우리 민족의 종교는 유교로서 우리 민족은 유교를 통해서 단합할 수 있고, 우리 민족이 단합하면, 일본을 물리치고 광복을 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지금까지 해오던 유교로는 안 되고 유교가 개혁해야 하는데, 종교식으로 개혁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보다 조금 앞서 중국에서 먼저 유교를 종교화하는 공자교운동이 일어났고, 강유위(康有爲)라는 걸출한 사상가가 나와 공자교의 사상적 제도적 기반을 닦아 놓았다.

    이병헌은 1913년부터 1925년까지 5차에 걸쳐 중국으로 강유위를 방문해 공자교에 대한 기본 노선을 전수받고 공자교의 사상적 기반이 되는 금문경학(今文經學)을 배웠다.

    그래서 향교식(鄕校式) 유교가 아닌 종교식 유교를 보급하려고 노력했다. 1923년 산청군 단성면(丹城面) 배양(培養) 마을에 공자의 문묘(文廟)를 세우고 제향을 올렸다. 문묘 아래 도동사(道東祠)를 짓고, 우리 나라의 대표적 학자인 퇴계 이황(李滉), 남명(南冥) 조식(曺植), 청향당(淸香堂) 이원(李源)을 봉향(奉享)하고, 그 왼쪽에 죽각(竹閣) 이광우(李光友)를 종향(從享)했다.

    이때 보수적인 유림들이 몰려와 반대를 하는 바람에 이병헌의 공자교운동은 더 이상 확산되지 못하고 말았다. 가장 큰 이유는 주자를 봉향(奉享)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금문경학에 입각해서 경서를 새롭게 해석해서 55책이라는 방대한 저서를 남겼다. 이 저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아직 나오지 않았다. 지난 4월 24일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에서 역사상 최초로 ‘진암 이병헌의 학문과 유교부흥운동’이라는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앞으로 이병헌의 학문이 본격적으로 연구되면 그의 독창적인 학문의 진면목이 밝혀질 것이다.

    * 獨 : 홀로 독. * 樹 : 세울 수.

    * 旗 : 깃발 기. * 幟 : 깃발 치.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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