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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0) 삼우부민(三憂富民)- 삼우당이 백성을 부유하게 했다

  • 기사입력 : 2015-04-2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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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우당(三憂堂)은 목화씨 전래자로 잘 알려진 문익점(文益漸) 선생의 호다. 삼우(三憂)란 ‘세 가지를 걱정한다’는 뜻이다. 세 가지 걱정은 무엇일까? 나라가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성인의 학문이 떨쳐 일어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자신의 도(道)가 서지 않는 것을 걱정한다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상 각 분야에서 후세에 혜택과 영향을 끼친 선현들이 많지만, 가장 풍부하고 다양하게 혜택과 영향을 고루 끼친 인물을 친다면, 삼우당 문익점을 뺄 수 없을 것이다. 삼우당이 목화씨를 가져와 모든 백성들이 헐벗고 추위에 떠는 것으로부터 구제한 공적은 모두가 이미 널리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러나 삼우당은 목화 종자를 가져온 큰 공적 때문에 그 학덕, 충절, 효행 등 여타의 뛰어난 점이 도리어 묻혔다.

    그는 중국에서 막 들어온 성리학(性理學)을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와 함께 연구하고 보급해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크게 일으킨 공로가 있다. 당시는 불교가 성행해 온 나라가 불교에 물들었고, 유학은 미미하게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형세였는데, 삼우당 등의 노력으로 유학이 뿌리를 내렸다.

    당시 원(元)나라 조정에서는 자주노선을 걸으려는 공민왕(恭愍王)을 축출하고 원나라의 앞잡이 덕흥군(德興君)을 세우려고 했는데, 삼우당은 원나라 황제에게 항변하다가 머나먼 교지(交趾)로 유배를 당했다. 돌아오면서 백성들을 생각해 목화씨를 가져온 것이다.

    조선왕조가 건립돼 높은 벼슬로 불렀으나, 고려의 신하로 자처하며 응하지 않고 충절을 지켰다. 그의 노력으로 우리나라에서 유학이 크게 힘을 얻어 학문하는 기풍이 일어났고, 윤리도덕이 회복돼 예의지국이 되었다. 그래서 사신(史臣)이 그를 ‘우리나라 도학(道學)의 으뜸’이라고 칭찬했다.

    삼우당의 공적이 널리 인정돼 서거 이후, 조선의 여러 임금들은 영의정에 추증하고 공신에 봉하는 등 여러 번 친히 제문을 지어 제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였다.

    유림들이 삼우당의 학덕을 추모하여 산청의 도천서원(道川書院) 등 전국 일곱 곳에 서원을 세워 제사를 받들고 있다.

    아쉬운 것은 난리 등으로 인하여 그의 저술이 다 없어져 버린 것이다. 조선 순조(純祖) 이후로 관계 기록을 모아 ‘삼우당실기(三憂堂實紀)’라 하여 세 차례 간행됐지만, 삼우당에 관한 글을 다 모은 것은 아니었다.

    이번에 삼우당의 글을 다시 다 모으고, 또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대동야승(大東野乘)’, 개인의 등에서 관계 기록을 다 수집해 ‘삼우당문집(三憂堂文集)’이라 이름하여 1000페이지 분량의 책을 새로 출판했다. 이에는 그 후손 문영훈(文永勳), 문용호(文龍鎬) 두 분 등 여러 후손들의 지극한 정성이 깃들어 있다.

    이번 출판을 계기로 목화씨 전래자로서만의 삼우당 문익점이 아니고 학자, 충신, 효자로서 그를 다시 인식해야 할 것이다.

    * 三 : 석 삼. * 憂 : 근심할 우.

    * 富 : 부유할 부. * 民 : 백성 민.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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