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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탐독(日常耽讀) (4) 김민정/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 기사입력 : 2015-04-09 09:3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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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금까지 3편에 걸쳐 '일상탐독'을 썼다.
    감사하게도 주변에서 대체로 좋은 평을 해주셨다.
    하지만 몸에 좋은 약은 입에 쓰고 입바른 소리는 가장 아프게 귀를 찌르는 것.

    어떤 이는 "문단이 자주 끊겨 글의 연속성이 떨어진다"고, 어떤 이는 "소설이나 시가 주는 환기에 너무 의지한다"고 지적했다.
    고견 감사드린다.
    그 말씀들을, 다소곳한 자세로 깊이 새겨 들었냐고? 천만에. 난 앞으로도, 계속해서, 내 맘대로 쓸 거다.
    그렇다. 나는 못됐다.
     
    하지만 H 여사님이 하신 말씀은 조금 달랐다.
    H 여사는, 내 보는 앞에서 당신 가슴에 오른손을 살포시 갖다대며 말씀하셨다.

    "모두 가슴 아픈 이야기야. 김 기자는 슬픈 이야기만 써."
    그래서 이번엔 바꿔보기로 했다.
    앳된 처자나 아이 엄마는 차마 쓸 수 없을, 30대 미혼여성이기에 가능한 좀 되바라지고 당돌한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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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난 첫날부터 결혼하자던 한 남자에게
    꼭 한달만에 차였다
    헤어지자며 남자는 그랬다
     
    너 그때 버스 터미널 지나며 뭐라고 했지?
    버스들이 밤이 되니 다 잠자러 오네 그랬어요
    너 일부러 순진한 척 한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두사부일체 보면서 한번도 안 웃었지
    웃겨야 웃는데 한번도 안 웃겨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잘난 척 한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너 그때 도미회 장식했던 장미꽃 다 씹어 먹었지?
    싱싱하니 내버리기 아까워서 그랬어요
    너 일부러 이상한 척 한거지, 시 쓴답시고?
    그런 게 시였어요? 몰랐는데요
     
    진정한 시의 달인 여기 계신 줄
    예전엔 미처 몰랐으므로 몰라 봬서
    죄송합니다, 사연 끝에 정중히
    號하나 달아드리니 son of a bitch
     
    사전은 좀 찾아보셨나요? 누가 볼까
    가래침으로 단단히 풀칠한 편지
    남자는 뜯고 개자식은 물로 헹굴 때
    나는 비로소 악마와 천사 놀이를 한다,
    이 풍경의 한 순간을 시 쓴답시고'

    <'피해라는 이름의 해피' - 문학과지성사/김민정/'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96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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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춘문예에 당선되고 얼마 지나지 않은 어떤 날, 술자리에서 한 선배가 말했다.
    "유경아. 니 그거 아나? 남자 못된 놈이 고시공부하고, 여자 못된 년이 시 쓴다."

    오호라. 고로 나는 못된 년?! 별안간 귀가 쫑긋해졌고 이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고시공부하는 놈과 시 쓰는 년 사이의 상관관계. 그것을 명확히 가늠하기는 사실 어려웠다.

    그러나 조금 다른 층위에서 둘 다 '문제적'이란 점에서 빙고.(신림동에서 고생하고 계신 분들께 심심한 위로를)
    게다가 나는 나 스스로를 충분히 막되먹었다고 여기며 매일매일을 처절한 반추와 반성 속에 살고 있으니…

    선배님! 거 참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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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해라고 고백하기에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버렸다
    이보다 더 화끈한 대답이 또 어디 있을까
    너무 좋아 뒤로 자빠지라는 얘기였는데
    그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신다면서 그 흔한 줄행랑에 바쁘셨다
    내 탓이 네 탓이냐 서로 손가락질하는 기쁨이었다지만
    우리 사랑에 시비를 가릴 수 없는 건 결국 시 때문이다
    줘도 못 먹은 것 그러니까 내 잘못이 아니란 말이다.'
     
    <'시,시,비,비' - 문학과지성사/김민정/'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110페이지>

     
    그런데 이 중구난방의 글을 쓰면서도 H 여사께 죄송한 마음이 앞선다.
    그 분의 온화하고 밝은 심성에 부응하는 아름답고 따스한 글을 나도 쓰고 싶다.

    그러나 아무리 잘 조성된 화원 안에서도 싹을 틔울 수 없는 씨앗도 있는 법이다.
    문학이란 애초에 그렇게 생겨먹은 종자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그건 어느 누구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점에서 일견 안심되기도 하고 일견 절망적이기도 하다.

    그렇다. 문학을 하고 살고 싶으나 문학은 내게 곁을 내주지 않고 있다. 단 한번도.
    그리고 이 정처없는 짝사랑은 평생토록 나를 '1차는 합격하였으되 2차에서는 늘 낙방하는' 만년 문학 고시생으로 살게 할지도.
    그러니 내가 점점 더 못돼질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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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역이었다
    연착된 막차를 홀로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어디선가 톡톡 이 죽이는 소리가 들렸다
    플랫폼 위에서 한 노숙자가 발톱을 깎고 있었다
    해진 군용 점퍼 그 아래로는 팬티 바람이었다
    가랑이 새로 굽슬 삐져나온 털이 더럽게도 까맸다
    아가씨, 나 삼백 원만 너무 추워서 그래
    육백 원짜리 네스카페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이거 말고 자판기 커피 말이야 그 달달한 거
    삼백 원짜리 밀크 커피를 뽑아 그 앞에 놓았다
    서울행 열차가 10분 더 연착될 예정이라는 문구가
    전광판 속에서 빠르게 흘러갔다 천안두리인력파출소
    안내시스템 여성부 대표전화 041-566-1989
    순간 다급하게 펜을 찾는 손이 있어
    코트 주머니를 뒤적거리는데
    게서 따뜻한 커피 캔이 만져졌다
    기다리지 않아도 봄이 온다던 그 시였던가
    여성부를 이성부로 읽던 밤이었다'
     
    <'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 문학과지성사/김민정/'그녀가 처음, 느끼기 시작했다' 95페이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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