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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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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7) 영수풍범(領袖風範)- 지도자의 모범

  • 기사입력 : 2015-03-3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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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 23일 새벽 싱가포르 전 수상 이광요(李光耀)옹이 향년 93세로 세상을 떠났다. 29일 국장을 치렀는데, 조문객이 150만명을 넘었다고 한다. 싱가포르 대부분의 국민들이 그가 마지막 가는 길을 세찬 빗줄기 속에서도 애도와 흠모하는 마음으로 보냈다. 전 국민의 절대적인 존경을 받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위한 기념관을 짓지 못하게 하는 것은 물론, 살던 집도 허물어 버리라고 했다. 이날 화장장에서 한 줌의 재로 사라졌다.

    이광요는 영국 식민 시절인 1923년 9월 16일 태어났다. 1945년 8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런던 정경대·케임브리지대에서 수학했던 그는 1950년 귀국해 노동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며 ‘차세대 정치인’으로 부각됐다. 1954년 실용주의 정당 ‘인민행동당’을 창립해 5년 뒤 1959년 총선에서 압승했고, 서른여섯 살에 이광요는 싱가포르 첫 총리가 됐다.

    그는 빗자루로 거리를 쓸고, 손으로 쓰레기를 주우며 범국민적 청결 캠페인을 시작했다. 거리의 쓰레기만이 아니었다. 1960년 부패방지법을 대대적으로 정비하며 부패 근절에 나섰다. 솔선수범하는 지도자를 국민이 따르면서, 오늘날 싱가포르 하면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인 ‘청결’과 ‘청렴’이 완성돼 갔다.

    1963년 말레이연방에 합병했다가 1965년 8월 9일, 축출돼 다시 독립한 싱가포르의 앞날은 암담했다. 정치상황이 불안하고 가난한 섬은 곧 주변국에 흡수될 거라는 관측이 대세였다.

    그러나 50년 만에 이 작은 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5만달러가 넘는 세계적인 물류·금융·비즈니스 중심지가 됐다.

    저절로 이렇게 된 것이 아니고 이광요라는 걸출한 지도자가 있어 강력하게 나라를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는 솔선수범하면서 옳다고 여기는 정책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갔다.

    독재자라는 비판에 대해 그는 “내가 이렇게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기까지 오지 못했을 것”등의 생전 발언은 국가 중심 노선에 대한 그의 확신을 보여준다.

    이광요는 통상 분야에선 완전한 자유를 부여했다. 다국적기업의 민원 처리 속도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전 세계 기업을 빨아들이기 위해 낮은 법인세율(17%)을 정착시켰고 양도소득세, 상속세는 아예 없다. 이런 개방적인 경제정책 덕에 1만여 외국 기업과 세계 유수 은행 200여 곳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다.

    국토가 좁고 자원이 없는 만큼 그는 인재 양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의 뜻을 받들어 2004년 싱가포르국립대 안에 이광요공공정책대학원을 설립했다.

    이 대학원은 “가장 우수한 인재가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 아래 소수의 엘리트 교육 시스템을 구축했다. 싱가포르를 일으켜 세운 ‘엘리트의 힘’을 세계 무대로 확장시킨 인재의 산실이다. 56개 국적의 학생 400여명이 이광요식 리더십을 배우고 있다.

    * 領 : 거느릴 령. * 袖 : 소매 수.

    * 風 : 바람 풍. * 範 : 모범 범.

    경상대 한문학과 교수

    ※소통마당에 실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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