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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탐독(日常耽讀) (3) 한강/ 노랑무늬영원

  • 기사입력 : 2015-03-26 09: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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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 한번 만나고 영영 이별한 사람이 있다.
     
    헤어질 때 또 보자는 약속은 하지 않았으나, 필연적으로 다시 만나게 될 거라 확신했었다. 작업실 바깥으로 나와 멀어져 가는 차 뒤꽁무니를 우두커니 바라보고 서있던 B. 그게 내가 본 마지막 B의 모습이다.

     
    B는 조각가였다. 마흔 초반이었으나 가무잡잡한 피부가 나이에 비해 건강해 보였고 걸음걸이는 활기찼으며, 내성적이었지만 타인에게 쉽게 드러내지 않는 생동감이 그의 눈 속에는 있었다. 2012년 늦봄, 취재차 들른 한 전시회에서 나는 B를 처음 만났다. 아니, 그의 작품을 먼저 만났다. 철사에 인견사를 친친 감아 공중에 매단, 커다란 항공모함을 연상케 하는 낯선 조형물. 그것은 멀리서부터 기묘한 흡입력을 내뿜으며 시선을 사로잡았다. 작가는 B였다. B? 고개를 갸우뚱했다. 1년 가까이 미술담당 기자로 살면서 도내에서 활동하는 웬만한 작가 이름 정도는 다 섭렵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B라는 이름은 생경했다. 작품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한참을 서성이는데, 한 남자가 주춤주춤 다가와 수줍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저… 제가 이 작품 만든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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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리지어 등산하는 팀들이 간혹 눈에 띄었지만 전체적으로 일요일치고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가다 보니, 언젠가부터 한 남자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뒤처져 있던 남자는 큰 보폭으로 나를 앞질러 갔는데, 등산이 서투른지 연신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내 앞으로 힘겹게, 나무뿌리 따위를 잡아가며 오르던 그는 문득 아래를 내려다보며 혼자서 헛웃음을 쳤다. 내 시선을 의식하고 있는 것 같았다. 매표소를 통과한 후 처음으로, 나는 대동문 위의 긴 의자에 걸터앉아 잠시 쉬었다.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커다란 고무 대야에 이온음료며 캔커피 따위를 담아 놓고 웃돈을 얹어 파는 아낙에게서 음료수 두 병을 사고 있었다. 남자는 내 옆으로 와 긴 의자 끝에 앉았다. "이거 마실래요?" "괜찮아요." "마셔요." "고마워요." 나는 목례를 하고 캔커피를 받아 들었다. 목이 말랐으므로 커피는 달고 시원했다." - 문학과지성사/한강/'노랑무늬영원' 266페이지

     
    그로부터 보름 뒤, 나는 B의 작업실에 있었다. 금속을 작품의 주재료로 쓰는 B는 공단지역에 작업실을 얻어 거의 하루종일 그 속에 틀어박혀 지냈다. 그의 작업실엔 돌, 목재, 쇠붙이 등 갖가지 재료가 넘쳐 났다. 나는 두 눈을 반짝이며 그 사이를 비집고 신나게 돌아다녔다. 그런 내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B의 따스한 시선이 등 뒤에 환하게 느껴졌다. B는 찬찬히 설명해주었다. 자신이 종내에 추구하게 된 진정한 아름다움은 '정지'가 아닌 '움직임'이라고. B는 불변과 영원을 내포한 돌이나 석고가 아닌 빛으로, 바람으로, 물의 흐름으로 움직이는 조각을 만들었다. 모빌 같기도 하고, 바람개비 같기도 하고, 로봇 같기도 한 B의 독특한 창조물들. 내가 그의 작업실에 머무는 동안 모모한 화랑 관계자들이 작품가격을 흥정하러 오기도 했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나는 B가 이제 막 주목받기 시작했음을, 음지에서 양지로 도약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날 밤 뜨거운 차를 내려마시며 B에 대한 기사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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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도, 나이도, 직업도 전혀 모르는 남자의 이미지가 십 년이 지난 지금 되살아나, 그 자리에 고스란히 있다. 만일 내가 그 남자와 수작을 나눴다면 이렇게 밝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와 나눈 것은 침묵이었다. 비장하지도 우울하지도 않은, 그저 침묵.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더 깊이 새겨진 몸의 따스함. 그 후 일 년 가까이 나는 가끔 그를 기억했다. 그 산비탈 인적 없는 바위 위의 휴식을. … 형언할 수 없는 막막함으로, 지금의 그를 만나고 싶어진다. 아마 결혼을 했겠고 아이들이 있을, 삼십대 후반에 접어들었을, 십 년의 시간 동안 풍화되고 얼마간 일그러졌을 그 사람을." - 문학과지성사/한강/'노랑무늬영원' 281페이지

    B의 부고를 접한 건 그로부터 다시 보름이 지나서였다. 내게 그의 죽음을 알린 지인은 '급성 심장마비'라고 B의 사인을 설명했다. 황망한 심정으로 장례식장을 찾아갔을 때, 나를 맞아준 건 붉어진 두 눈에 머리를 질끈 동여맨 B의 여동생과 넋이 나가버린 B의 나이든 부모였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B의 영정 앞에 절을 올렸다. 사진 속 B는 웃고 있었다. B의 여동생은 말했다. "신문을 복사해 식구들한테 보여주더라구요. 워낙 내성적이라 얼굴 알려지는 일 절대 내색하질 않는데, 기자님 기사는 오빠 마음에 좋았나봐요." 한참을 멍하게 앉아있다 일어서는데, 그녀가 뒤따라와 두 손을 잡으며 말했다. "오빠 마지막 길에 큰 선물 주셨어요. 감사합니다." 고작 두어 시간 차를 나눠마시며 간혹 침묵하고 간혹 웃었던 기억. 그것도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情)이라면 정이고, 애(哀)라면 애랄까. 눈물이 나오려고 했고, 나는 서둘러 고개를 돌려버렸다. 저 너머로 문상객들 사이를 비집고 깔깔대며 뛰어다니는 꼬마들이 보였다. 검은 양복이 영 불편해 보이는 사내아이와 양 갈래로 앙증맞게 머리를 땋아내린 계집아이. B의 아이들이라고 했다. "오빠가 올케랑 갈라서고 부모님이 애들을 거둬 키웠어요. 오빠는 주말마다 내려가서 돌보고. 이제 어느 정도 키워서 오빠도 숨 좀 돌리나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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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화기를 귀에 붙인 채 나는 거실 바닥에 웅크려 앉는다. "그런데 좀 마음 아픈 얘기가 있어" "뭔데?" "확실친 않는데, 오빠도 건너 건너 들은 얘기라는데… 그 사람, 부모님이 하는 가게를 지키다가 죽었대. 강도한테 총 맞아서. 벌써 이 년도 더 됐다더라. 모르던 사람이지만 그런 얘기 들으니까 마음이 좋지 않더라. 너도 그렇지?"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 나는 우두커니 그 자리에 앉아 있다. 이 년 전이라고 했다. 마음 한편에 미세한 파문이 일어났다가 차츰 잠잠해진다. 내가 몸을 일으키기 위해, 다시 혼자서 걷고 움직이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던 바로 그 무렵 그는 죽었다. 결국 나와 아무 관계 없었던 사람이다. 영원히 비껴가고 말 운명이었던 사람이다. 그의 긴 잠 속에 내 기억도, 설령 형체 뿐이었다 해도, 영원히 묻혀버렸다." - 문학과지성사/한강/'노랑무늬영원' 304페이지

    가끔 B를 떠올린다. 그에게서 느껴지던 고요함, 내적 충일, 예술적 에너지를 생각한다. 그의 작업실이 있던 자리 부근을 지나온 날이면 B가 등장하는 꿈을 꾸기도 한다. B가 없는 세상에 남겨진 오누이를 위해 기도한 적도 여러 번이다. B가 살아있다면, 이라는 가정 아래 B가 오래오래 살면서 펼쳐보였을, '움직임' 가득한 예술세계를 상상해보기도 한다. 물론 그 상상 속에서 B의 신작들을 가장 먼저 소개하는 기자는 바로 '나'다.

    단 한번 만나고 영영 이별한 사람 B.
    B씨. 거기서도 안녕한가요? 저는 잘 지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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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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