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바일  |   유튜브  |   facebook  |   newsstand  |   지면보기   |  
2024년 04월 19일 (금)
전체메뉴

[사람속으로] 세월호 구조 참여했던 SSU 주환웅 상사

어떤 극한 상황에서도 임무 다하는 바다 사나이
1998년 해군 부사관으로 입대
천안함 사건 때 작전 수행

  • 기사입력 : 2015-02-04 22:00:00
  •   
  • 메인이미지
    해군 해난구조대(SSU) 주환웅 상사가 대원들의 사진으로 디자인된 그림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그날 처음으로 선체에 진입했을 때 눈에 보였던 것은 칠흑 같은 어둠뿐이었다. 그 속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두 손으로 주위를 더듬는 것뿐이었다”

    지난해 온 국민에게 슬픔을 안겼던 세월호 침몰 사건 현장에서 가장 앞장서서 구조 활동을 펼쳤던 해난구조대.

    세월호 구조 작전에 해난구조대원으로 참여했던 주환웅(38) 상사를 지난달 27일 오후 창원시 진해구 진해 기지사령부 해군5성분전단에서 만났다.

    ◆만남

    주환웅 상사는 지난 1998년 해군 부사관 173기로 입대해 세월호 침몰사건이 있기 전인 2010년 천안함 사건 때 해난구조대원으로서 작전에 참여하기도 했다.

    키 182㎝, 몸무게 78㎏의 건장한 체격. 까무잡잡한 피부에 굵은 목소리를 가진 그를 보는 순간 한눈에 해난구조대원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실 주 상사의 몸무게는 1년 전만 하더라도 지금보다 10㎏ 정도는 더 나갔었다. 하지만 지난해 4월부터 11월까지 7개월 동안 세월호 구조 작전에 참여하면서 몸무게가 크게 줄었다. 수개월 동안 하루 2~3시간씩 쪽잠밖에 자지 못한 데다 강도 높은 수색작전 때문에 왕성했던 식욕마저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하루 4차례씩 바다에 들어가 수색작전을 펼쳤는데 수색이 끝나고 나서는 바로 배 위에서 다른 수색 동료들을 보조해주고 장비를 정비하는 등 쉴 틈 없이 일했다. 하루 2~3시간 정도만 자면서 수색작전에 매달렸다. 오늘과 내일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다”며 당시의 힘든 상황을 설명했다.

    ◆세월호 침몰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했다는 소식을 뉴스로 접했을 때 나를 비롯한 부대원들은 이미 출발 준비를 하고 있었다. 5분 대기조가 먼저 출발했고, 이어서 사고 다음 날인 17일 새벽 1시께 현장에 도착했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했던 것은 선체의 도면을 완벽하게 외우는 것이었다.”

    수심 200~300m에서도 자유롭게 잠수를 할 수 있을 정도로 경험 많은 베테랑 해난구조대원이었지만, 50여m 남짓한 곳에 가라앉은 세월호 앞에서 주 상사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됐다.

    “바닷속에도 물길이 있어서 물길이 멈춰 있을 때 혹은 물길이 심하지 않을 때 작전을 펼칠 수 있는데 세월호가 침몰한 지형은 시도 때도 없이 물길이 변하는 지형이었다. 아무리 좋은 장비를 갖추고 있어도 세월호 작전에 사용할 수 있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가까스로 선체에 진입할 수 있었지만, 밖과 달리 안은 시정 0.1~0.5m밖에 안 돼 장님이나 마찬가지인 상황이었다. 그곳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두 손으로 주위를 더듬는 것 말고는 없었다. 주위에 물건이 잡히면 구석으로 치우고 객실과 객실 사이에 복잡한 공간을 오로지 촉감에만 의지한 채 희생자를 찾아다녔다. 머릿속에 입수하기 전 외워뒀던 선체의 도면만을 생각하며 한 발짝 한 발짝씩 조심스럽게 나아갔다. 한 발만 잘못 디디면 돌아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수색을 하다가 희생자를 발견하기라도 하면 희생자를 있는 힘을 다해 양팔로 꼭 안고 조심스럽게 수면으로 부상했다”

    그렇게 주 상사가 구조 작전 동안 선체에 진입한 횟수는 30회, 잠수시간으로는 700분. 그리고 극한의 노력 끝에 수습한 희생자는 9명이었다.

    메인이미지
    해군 해난구조대(SSU) 주환웅 상사가 진해 군항의 군함에 있는 잠수 장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김승권 기자/

    ◆세월호가 그에게 남긴 것

    지난해 4월 25일 진도체육관에서 있었던 첫 실종자 가족설명회 당시 주 상사는 브리핑을 마치고 체육관을 나가려던 참이었다.

    그때 한 어머니가 그에게 다가와 고개를 숙인 채 귓전에 겨우 들릴 만큼 작은 목소리로 “우리 아이도 찾아 달라. 잘 부탁한다”며 군복 왼쪽 가슴주머니에 작은 메모를 넣었다. 함정으로 복귀해 펴본 쪽지에는 “승무원과 학생 구별 말고 구조해달라”는 요청의 글이 적혀 있었다. 메모를 전달한 어머니는 바로 승무원의 어머니였다. 하지만 당시 분위기로는 승무원은 피의자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그 어머니는 누구에게도 아들의 행방을 묻지 못했다.

    평생 눈물 흘리는 일이 없었던 주 상사는 그 어머니의 애끊는 마음에 눈물을 훔칠 수밖에 없었다. 동료들 역시 슬픈 사연을 듣고 당시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들었던 상황을 극복하고 구조작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주 상사는 폐소공포증이 있었다. 지난 2010년 폭침된 천안함 선체에서 구조 작업을 펼치다가 좁은 공간에 갇히는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다. 가까스로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사고 뒤로는 좁은 공간에는 잘 가지 못하고 달라붙는 옷은 입지 못했다.

    “세월호 구조작전을 하면서 매일같이 어둡고 좁은 공간에서 작업해야 했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폐소공포증 따윈 생각이 나지 않을 만큼 긴박했었다.” “나에게는 중학생 아들이 있다. 내 아이와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물속에 있다고 생각하니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극복할 수 있었다. 그것은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그랬을 것이다.”

    주 상사는 현재 통영함에서 근무하고 있다. 원래 그는 지난해 세월호 사건이 터질 때도 해난구조대에서 통영함으로 부대를 이전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그는 소속 부대와 상관없이 자원해 곧장 현장으로 달려갔다.

    다시 해난구조대에 들어갈 마음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에게서 짧게 ‘예’라는 대답이 들려왔다.

    고휘훈 기자 24k@knnews.co.kr


    ☞ 해난 구조대= 해난구조대는 해군에 소속돼 있는 해난구조 임무를 수행하는 특수부대로 전시에는 주요 항만 개항 유지 지원과 상륙작전 때 전투지원 임무를 수행, 평시에는 해난구조작전 수행과 수중·수로 장애물 제거 등 사건 해결을 전담한다. 1950년 9월 ‘해상공작대’라는 이름으로 창설된 해난구조대는 1955년 지금의 ‘해난구조대(SSU·Ship Salvage Unit)’로 명칭이 변경됐다.

    해난구조대는 1993년 서해 훼리호 침몰사고, 1994년 성수대교 붕괴사고, 1998년 남해 북한 반잠수정 침투사건, 2002년 제2연평해전, 2010년 천안함 침몰 사건, 2011년 아덴만 여명작전 등에 투입돼 맹활약을 펼쳤다.

  • < 경남신문의 콘텐츠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바, 무단전재·크롤링·복사·재배포를 금합니다. >
  • 고휘훈 기자의 다른기사 검색
  •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플러스 카카오스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