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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비경 100선] (73) 양산 법기수원지

누구의 시선도, 발길도 없었던 고독의 정원

  • 기사입력 : 2014-09-11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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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광객들이 양산시 동면 법기수원지 둑 위를 걷고 있다.




    소식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되었다고요. 그것도 하나가 아닌 둘씩이나 되는 아이들의 아버지가요. 그래선 안 되는 일이지만, 한 번은 당신이 있을 법한 곳을 향해 외쳐 묻고 싶습니다. 정말인가요? 당신, 정말 그렇게 되었나요?



    누군가 농담처럼 건넨 그 소식을, 나는 은성한 거리가 멀찍이 내려다보이는 카페 창가에 앉아 들었습니다. 당신의 근황은 함부로 쏜 화살처럼 가슴 한복판에 날아들었습니다. 나는 차마 웃을 수가 없었어요. 혼자가 아니었는데도, 왜 그 순간 이 세계의 끝에 홀로 선 기분이 들었을까요. 매우 추운 겨울날이었음에도 나는 연거푸 차가운 얼음물과 뜨겁고 진한 커피를 번갈아 들이켜야 했습니다. 고개를 한사코 창쪽을 돌린 채 말이죠. 수년 전처럼 심장이 아리게 떨리는 것도, 손써 볼 도리 없는 절망에 온몸을 옴짝달싹 못한 것도 아니었는데 말입니다. 왜 그랬던 걸까요, 나는.



    그러나 오해는 하지 마세요. 풀잎 하나, 바람 한 점에서도 당신을 발견하던 날들은 지나갔습니다. 당신이 나 아닌 다른 사람을 두고 영원을 맹세하고 그 사람에게서 당신을 빼닮은 두 아이를 얻었듯, 나 또한 당신에게 갈구했던 모든 것들을 놓아버린 지 이미 오래입니다. 그동안 당신과 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색깔의 사랑도 해보았습니다. 당신을 조금도 닮지 않은 사내들을 만나서 말이죠. 하지만 아주 가끔 간절히 당신 생각을 했다는 건 숨기지 않겠습니다. 여전히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리며 담배를 피우는지, 겅중겅중 징검다리를 건너는 사람처럼 서툰 걸음으로 길을 걷는지, 아직도 술을 마시면 웃음이 많아지는지. 미치도록 궁금했던 날들이 내겐 있었습니다.



    오늘, 나는 당신 없이 이곳에 왔습니다. 무심히 내원에 들 듯, 무작정 차를 몰아 대륙을 향해 놓인 아시안하이웨이(Asian Highway)를 타고 이곳에 왔습니다. 80년 동안 사람들의 시선을 허락한 적이 없던 나무와 물과 바람과 그늘은 그때와 다름없이 수줍어 보입니다. 당신 기억하나요? 하늘을 향해 쭉쭉 뻗은 싱싱한 히말라야시다와 편백나무를 바라보는 대신, 허리가 댕강 잘린 흉물스러운 나무 앞에 한동안 걸음을 멈췄던 순간을. 나무의 묘비명은 이러했지요. ‘1980년 7월 21일 한여름 오후 7시경 벼락을 맞아 57년간의 생을 마감하다’ 당신은 내 손을 잡아 끌었습니다. 벚나무와 추자나무, 맥문동이 흐드러지게 돋아난 반대편 풀숲으로요. 그러나 꼿꼿이 서서 죽은 나무의 혼령에게서 나는 쉽사리 눈길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당신을 따라가면서도 이상한 예감에 자꾸만 뒤를 돌아다보았죠. 거기에서 이미 나는, 칼자루가 아닌 칼날을 쥐고 서로를 할퀼 우리 두 사람의 미래를 보아버린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지금 댐마루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섰습니다. 124개나 되는 돌계단을 오르면 하나하나 조각나 있던 거대한 정원이 조금씩 완전한 모습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내 작은 두 발밑이, 푸르고 또 푸르군요. 그 짙은 녹음 사이를 신선한 바람이 부메랑처럼 빠르고 가볍게 가로지릅니다. 124번째 계단에서 나는 비로소 거대한 물과 조우합니다. 발아래 펼쳐진 숲과 이마에 맞닿은 물의 경계에 나는 홀로 서 있습니다. 꽃다발처럼 사방으로 퍼져 자라난 반송 가지 사이로 수면 위에 뜬 잔물결과 그 너머의 유연한 산능선이 어우러져 있네요. 몰려가고 몰려오는 무구한 물의 흐름. 100년에 가까운 고독을 기꺼이 감내해온 취수탑의 아련한 그림자. 당신이 없어도, 이곳의 풍광은 변함없이 눈부시군요.



    이제 나는 데크를 따라 숲으로 되돌아갑니다. 데크 아래 석조 건축물 위 석각(石刻) 기억하나요? ‘원정윤군생(源淨潤群生): 깨끗한 물은 많은 생명체를 윤택하게 한다’ 아름다운 뜻과는 맞지 않게 서늘하다 못해 오싹한 기운이 감돌던 그 글씨 말입니다. 그 앞에서, 우리 두 사람은 맞잡고 있던 두 손을 더욱 꼭 그러잡았던가요. 그곳에 유달리 섬뜩한 기운이 감돌았던 건, 단지 취수관이 지나는 길목이기 때문만은 아닐겁니다. 글씨의 주인은 사이토 마코토, 일제강점기 문화통치를 주창했던 제3대·제5대 조선총독이었죠. 그는 1932년 댐이 완공되는 날 단단한 돌에 이 다섯 글자를 또박또박 새겼습니다. 그날 우리가 아무런 말 없이 서로를 부여잡았던 건, ‘윤택함(潤)’ 안에 숨겨진 철저한 무자비와 악랄함을 직관적으로 알아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곳에서 누구와, 어떤 소리들 속에 있나요. 이곳은 맹렬한 매미울음으로 가득합니다. 하지만 곧 청아한 귀뚜라미 소리가 들리고 가을이 찾아오겠지요. 겨울엔 고요한 물 위로 꽃잎처럼 진눈깨비가 흩날릴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당신은 팔다리에 살이 붙고 힘이 오른 당신의 두 아이와 함께 이곳에 오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땐 당신도 한 번쯤은 내 생각을 해주었으면 합니다. 나무 그늘에서, 계단참에서, 물결을 바라보면서, 아무 곳에서나 상관없을 것 같습니다. 한 번이면 됩니다. 그것이 그리 큰 욕심은 아니겠지요.



    그리고 하나 더. 당신에게 내 소식은 영영 전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내가 당신 소식을 듣는 것 또한 이것이 마지막이길 바랍니다. 부디 안녕히 계세요.

    글= 김유경 기자 bora@knnews.co.kr

    사진= 성승건 기자 mkseong@knnews.co.kr

    ▲법기수원지

    양산시 동면 법기리에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7년 착공돼 1932년 완공됐다. 저수량은 150만여t으로 부산시 금정구 두구동·청룡동·남산동 일원 약 7000여 가구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80년간 상수원 보호를 위해 일반인 접근을 허락하지 않다가 지난 2011년 7월 15일 수원지 전체 680만㎡ 중 2만㎡ 정도의 일부 부지만 개방됐다. 입구에서 댐으로 오르는 수림지에는 수령이 130년 가까이 된 히말라야시다, 편백나무, 벚나무가 빼곡하다. 음식물 반입, 애완견 출입, 나물류·씨앗 채취를 금한다. 하절기(4~10월)엔 오전 8시~오후 6시, 동절기(11월~3월)엔 오전 8시~오후 5시까지 개방한다.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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