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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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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비경 100선] (72) 산청 백운계곡

바윗자락 타고 쏟아지는 흰구름

  • 기사입력 : 2014-09-04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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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군 단성면 백운리 백운계곡의 용문폭포가 시원한 물줄기를 쏟아 내고 있다. 수많은 폭포로 이어지는 백운계곡은 이름없는 폭포와 소가 이어져 빼어난 풍경을 보여준다.




    ◆신선이 노닐던 곳 ‘용문동천’

    도가(道家)에서는 신선들이 사는 별천지를 일컬어 ‘동천(洞天)’이라 한다. 산과 물이 어우러져 마치 낙원같이 빼어난 풍경을 갖춘 곳을 말한다.

    선인들은 수려한 골짜기를 찾아 그곳을 ‘동천’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이를 바위에 새겼다. 하동 쌍계사 아래 ‘화개동천’과 같이 일단 ‘동천’이라는 말이 붙으면 일단 믿고 볼만한 경치가 갖춰진 곳이라 할 수 있다.

    산청 백운계곡도 이런 곳들 중 하나다. 계곡 바위에는 ‘용문동천(龍門洞天)’, ‘백운동(白雲洞)’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백운계곡은 대원사계곡, 내원사계곡, 중산리계곡, 거림계곡 등 지리산의 굵직한 계곡들의 유명세에 비해 다소 덜 알려진 곳이다. 그러나 이들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 빼어난 경치를 자랑한다.

    백운계곡은 의령군과 산청군 시천면 중산리로 이어지는 20번 국도를 따라가다 하동군 옥종면으로 갈라지는 칠정삼거리를 지나 백운동계곡이라는 푯말을 따라 들어가면 된다.

    백운계곡은 백두대간의 실질적인 마지막 봉우리로 알려져 있는 산청 웅석봉(1099.3m·곰돌봉) 줄기가 남쪽으로 뻗어내리는 달뜨기 능선에서 발원해 오른편에는 수양산과 시무산, 왼편으로는 백운산을 두고 있다. 5㎞가량 되는 길이의 계곡은 10여개의 폭포와 소가 이어진 뒤 덕천강으로 흘러간다.

    규모가 웅장하지는 않으나 깨끗하고 거센 물줄기가 구름처럼 흰 바윗자락을 타고 굽이쳐 흐른다. 거침없이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노라면 가슴이 후련해지고 청량감마저 느껴진다.

    계곡은 폭포와 소(沼)들로 줄줄이 이어진다.

    이름난 폭포들처럼 깎아지른 절벽에 감히 범접하기 힘든 거대한 물줄기가 흐르는 것은 아니다. 백운계곡의 폭포수는 대체적으로 두세 사람의 키 정도 되는 높이에서 쏟아진다. 하지만 이곳을 지나는 이들의 짐을 내려놓게 하고 붙잡아 두기에는 모자람이 없다. 폭포수는 옥빛을 띠는 맑고 깨끗한 소로 모인다. 소에 가득 고인 물은 또 아래로 쏟아지고 또 모인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폭포와 소가 연속되면서 한시도 지루할 틈이 없다. 맹렬하게 쏟아지는 물줄기는 하얗고 너른 평평한 바위 사이를 타고 흐른다. 백운동과 백운계곡의 ‘백운(白雲)’은 이 구름같이 하얀 바윗자락을 보고 이름 붙여진 것이라 전해진다.

    크고 작은 폭포와 소, 하얗고 널찍한 바위들에는 옛 선인들의 풍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이곳을 자주 찾아 즐긴 7명이 있었는데, 이들을 백운동 7현이라 불렀다. 이들은 이곳에 모여 용문암 개울 열여덟 굽이에 이름을 붙여 시를 지었다고 한다.



    남명 조식 선생이 가장 사랑한 쪽빛 계곡

    백운계곡을 말할 때 조선 중기 성리학의 대가인 남명 조식(曺植 1501~1572년) 선생을 빼놓을 수 없다.

    영남 사림파의 거두였던 조식 선생은 합천에서 태어나 61세 때 백운계곡 부근 덕산으로 옮겨와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 양성에만 전념한 전형적인 선비다. 나라가 어려울 땐 상소를 올리며 직언을 서슴지 않았다. 명종과 선조 등은 그의 학덕을 높이 사 조정으로 거듭 불렀으나, 끝내 대자연에 묻혀 산 ‘산림처사’였다.

    덕산에 살던 시절 조식 선생은 이 백운계곡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계곡 곳곳에 놓인 널찍한 바위에 앉아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선생은 제자들과 함께 수려한 경치를 즐기며 풍류에 젖기도 하고, 나라 걱정에 시름에 잠기기도 했으리라.

    완만한 계곡을 오르다 보면 바위에 새겨진 글씨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영산펜션 간판 아래 바위에는 ‘龍門洞天(용문동천)’이라는 글씨가, 펜션 안쪽에는 ‘白雲洞(백운동)’이라 쓰여져 있다. 물줄기를 거슬러 가다 보면 ‘嶺南第一泉石(영남제일천석), 登天臺(등천대)’라는 글씨도 잇따라 만나게 된다.

    용문천이라 쓰인 바위 왼쪽으로 조금 더 돌아가보면 ‘남명선생장구지소(南冥先生杖之所)’라는 글귀가 새겨진 바위도 볼 수 있다. 이는 남명 선생이 물에 발을 담그며 즐길 때 지팡이를 짚고 신발을 끌며 왔던 곳이라는 의미다. 조식 선생이 생전에 가장 즐겨 찾는 장소였으리라 추측된다. 조식 선생 사후 300여 년이 지난 19세기 말께 유림(儒林)들이 새겼다는 기록이 있다.

    또 이곳에서 조식 선생은 ‘푸른 산에 올라보니 온 세상이 쪽빛과 같은데, 사람의 욕심은 그칠 줄 몰라 아름다운 경치를 보면서도 세상사를 탐한다’라는 시를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지루할 틈 없는 변화무쌍한 계곡

    기록에 따르면 백운계곡에는 20여개에 달하는 폭포와 소에 이름이 붙어있다고 한다. ‘목욕을 하면 절로 아는 것이 생긴다’는 의미를 지닌 다지소(多知沼), ‘옳은 소리만을 듣는다’는 청의소(聽義沼)를 비롯해, 아함소·장군소 등 소(沼)와 탈속폭포·용문폭포·십오담폭포·칠성폭포·수왕성폭포 등의 이름을 가진 십수개의 폭포가 있다고 전해진다.

    또 주변에는 화장암·한림사·용문암 등의 암자가 있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이들 이름이 어느 곳을 가리키고 있는지는 전혀 알 수 없다. 이를 알려주는 안내판은 고사하고 작은 표지판 하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발길이 닿는 곳마다 변화무쌍한 계곡을 보고 있으면 어느 곳이 어떤 이름을 가지고 있는지는 크게 중요치 않아 보인다. 어쩌면 계곡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폭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같은 듯 다른 폭포와 소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러나 백운계곡은 보고 즐길 수 있는 지역이 제한돼 있다. 골짜기 안 마을인 점촌에서 비포장 수레길을 따라 오르면 백운농원 입구에서 오솔길로 바뀐다.

    이를 따라 걷다 보면 곧 사유지임을 알리는 굳게 닫힌 낮은 철문이 보인다. 이곳까지 1㎞ 남짓 되는 짤막한 골짜기를 따라서만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이 구간만으로도 볼거리는 차고 넘친다.

    글= 김언진 기자 hope@knnews.co.kr

    사진= 전강용 기자 jky@knnews.co.kr



    ※이 기사는 경상남도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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