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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1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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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56) 송창우 시인이 찾은 산청 덕산

세상만사 수많은 이야기들을 모두 품고도
천년만년 흔들리지 않는 것은 지리산 너뿐

  • 기사입력 : 2013-08-01 1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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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 덕산에서 바라본 덕천강과 지리산 전경.
    남명 조식의 옛집인 산천재.
    대원사 계곡.
    대원사 다층석탑.
    남명기념관의 남명 조식 동상.
    조개골 입구의 새재마을.
    글·사진=송창우


    덕천강 바라보고 앉은 산천재 들면
    지리산의 고상한 기운이 스며든다

    조개골서 흘러내려오는 대원사계곡
    너럭바위 앉아 두발 담그면
    세상의 온갖 시름이 사라진다

    수련장으로 변한 유평분교엔
    쓸쓸한 이야기 졸졸 흘러내리고
    대원사 다층석탑엔 전설이 고인다



    지난해 늦가을 남사마을을 둘러보는 길에 덕천강을 거슬러 산천재에 든 일이 있다. 천왕봉은 머리에 흰 눈을 올리고, 사리마을 작은 집들의 처마엔 주렁주렁 곶감이 걸리고 있던 때였다. 그날 나는 마지막 잎사귀를 떨구고 있는 남명매 옆에 서서 매화꽃이 피는 봄날에 꼭 다시 오리라 했었다. 그런데 사는 일에 쫓기느라 매화꽃은 잊고, 매화나무 잎사귀마다 푸른 연못이 고인 한여름에야 다시 찾았다.

    남명 조식의 옛집. 산천재는 덕산에 있다. 지리산을 각별히 좋아해서 열두 번이나 지리산을 찾았던 남명이 61세 되던 해, 마침내 터를 잡고 학문에 정진하다 생을 마친 곳이다.

    산천재로 들어서는 입구에는 덕산 시냇가의 정자에 써 붙였다는 선생의 시 한 편이 작은 돌에 새겨져 있다.



    천섬 들어가는 큰 종을 보소서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어떻게 해야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산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집이 아니라 지리산 천왕봉이다. 남쪽에서 시작된 지리산의 장엄한 줄기는 서북쪽으로 이어지며 천왕봉에 이른다. 시인이자 건축가인 함성호의 표현대로 산천재는 마당에 온전히 지리산을 들인 집이다. 집은 지리산의 능선 한 자락도 거슬리지 않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 덕천강을 바라보고 앉았다.

    집의 이름으로 삼은 ‘산천(山天)’은 주역의 ‘산천대축괘(山天大畜卦)’에서 따온 것인데 ‘강건하고 독실하고 빛나서 날로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를 담은 것이다. 선생이 일생을 은거하며 추구했던 높은 도학의 경지를 어찌 알랴만, 산천재에 들면 절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잡념이 사라진다. 어쩌면 그건 산천대축괘의 형상처럼 골짜기마다 하늘을 품고 있는 지리산의 고상한 기운이 내 안에 조금씩 스며드는 까닭이기도 하겠다.

    남명은 산천재에서 지내며 오로지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을 길렀다. 산천재 맞은편에 있는 남명기념관에는 선생이 늘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는 성성자(惺惺子) 방울과 경의검(敬義劍)이라 부르는 한 자루의 단검이 있다. 두 개의 쇠방울이 달린 성성자는 방울 소리가 울릴 때마다 스스로를 깨워 몸가짐을 살피고 반성했던 성찰의 방울이다.

    그리고 경의검에는 ‘내명자경(內明者敬)’과 ‘외단자의(外斷者義)’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안으로 나를 깨우치는 것은 경이고, 바깥으로는 결단 있게 행동하는 것이 의’라는 뜻이다. 학문에 정진하는 한편으로 배운 만큼 사회적 실천을 행하라는 선생의 사상이 번뜩이는 칼이다.

    세속의 벼슬자리에는 일생 처사를 자처하며 나아가지 않으면서도, 왕의 실정에는 칼날 같은 문장으로 비판했던 남명. 그 높은 덕과 올곧은 기개는 정인홍, 곽재우를 비롯한 영남 우도의 많은 선비들에게 전해지면서,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책이 아니라 칼로써 나라를 구하는 의로운 실천으로 이어졌다.

    산천재와 남명기념관을 둘러보고 덕천강으로 내려섰다. 강가에 서니 서늘하고 푸른 물 속에도 지리산이 앉았고, 둥글둥글한 돌 속에도 지리산이 있다. 나는 다시 흐르는 물을 거슬러 원리로 간다. 원리는 지리산에서 흘러온 두 줄기의 물길이 하나로 합쳐지는 곳에 있는데 이곳에 선생의 학문을 기리며 후학들이 세운 덕천서원이 있고, 맞은편 물가 쪽에는 세심정이 있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겼어라

    아이야, 무릉(武陵)이 어디냐 나는 옌가 하노라



    양단수의 한쪽 물줄기는 천왕샘에서 발원하여 중산리를 지나오는데 옛 선현들의 지리산 유람기들을 살펴보면 이 물줄기의 옛 이름은 살천(薩川)이거나 시천(矢川)이다. 덕산을 갈 때마다 덕산이란 이름 대신 시천이란 지명을 쓰는 까닭이 몹시도 궁금했었는데, 그런 역사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또 다른 물줄기는 지리산의 동쪽 끝자락에 있는 조개골에서 시작되어 유평마을과 대원사를 돌아 삼장면을 지나온다. 삼장면은 옛날 삼장사가 있었던 데서 유래한 지명인데, 사실 덕산이란 시천면과 삼장면 일대를 다 아우르는 큰 이름이다.

    덕천서원을 둘러본 뒤에 나는 피서도 겸할 겸 대원사를 거쳐 덕천강의 한쪽 발원지인 조개골까지 가보기로 했다. 조개골에서부터 흘러내려오는 물길은 유평 계곡인데, 사람들 대부분은 그냥 대원사 계곡이라 부른다. 대원사 계곡은 푸르고 깊다. 삼십 리에 이르는 긴 계곡은 지리산이 품은 수많은 계곡들 중에서도 빼어나게 아름답다.

    유홍준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서 대원사 계곡을 일러 남한 제일의 탁족처라고 했는데, 푸른 솔그늘이 드리워진 너럭바위에 앉아 맑은 물 속에 두 발을 담그면 세상의 온갖 시름일랑 깨끗하게 잊을 만하다.

    크고 부드러운, 살짝 붉은빛이 감도는 바윗돌들을 지나온 물은 곳곳에 작은 폭포와 소를 만들었다. 하나의 소에는 또 하나의 이야기들이 고여 있는데, 가야의 마지막 왕인 구형왕이 소와 말을 데리고 와서 물을 먹였다는 소막골 얘기가 있고, 용이 100년간 살다가 승천했다는 용소의 이야기가 있다.

    가랑잎 초등학교라 불리던, 지금은 폐교가 되어 수련장으로 변한 유평분교의 쓸쓸한 이야기가 졸졸 흘러내리고, 화재로 절집이 모두 소실되는 일이 되풀이되는 동안에도 홀로 절터를 지키고 있었던 대원사 다층석탑의 전설이 비췻빛 물 속에 고인다.

    대원사는 비구니들의 수행처로 이름난 절집이다. 대원사의 단청에는 하늘빛과 물빛, 산빛이 서렸고, 잿빛 승복을 입고 사리전으로 가는 스님들의 발걸음은 구름을 밟는 듯 고요했다. 사리전은 이 땅의 비구니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 정진하는 선방이다.

    대원사를 여러 번 왔어도 사리전 옆에 있어 제 모습을 온전히 보지 못했던 보물 제1112호 다층석탑을 종무실의 허락을 받고 이번에 살짝 보게 되었다. 아래쪽 기단의 사면을 받치고 선 문신상의 조각도 특별했지만, 대원사 다층석탑의 가장 아름다운 멋은 그 빛에 있다. 철분이 많은 탓에 오랜 세월을 녹슬어온 석탑의 붉은 빛. 그것은 세상에서 내가 마주친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녹이다.

    대원사에서 유평마을을 지나 다시 5㎞쯤 떨어진 새재마을로 간다. 새재마을은 해발 700m쯤에 있는 하늘 아래 첫 동네다. 여순사건과 6·25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화전민들이 살았던 마을인데 지금은 10여 가구가 약초를 캐고 민박을 치며 산다.

    새재마을에 서면 아래로는 대원사 계곡의 깊은 골짜기가 보이고, 눈을 조금 들어 올리면 하늘에 잇닿은 웅석봉과 달뜨기 능선이 보인다. 이곳에 숨어든 빨치산들이 저 달뜨기 능선 위로 뜨는 달을 보며 가족들을 그리워했다는 아픈 이야기들이 오늘은 낮달로 뜬다.

    대원사 계곡의 아름다움 뒤에는 그런 서글픈 이야기들도 있다. 다만 세상만사 수많은 이야기들을 모두 품고도 천년만년 흔들리지 않는 것은 오직 지리산뿐. 나는 노각나무 흰 꽃이 떠 있는 조개골 푸른 소에 노각나무처럼 훌러덩 옷을 벗고 한참을 앉았다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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