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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3월 29일 (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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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산책 (55) 유홍준 시인이 찾은 거창 북상면의 바위들

세월은 흘러도 변함이 없구나, 너의 그 의연함은…

  • 기사입력 : 2013-07-1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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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관석
    탕건바위
    사모바위
    사선대
    분설담
    강선대
    농산리 고인돌

    유홍준 시인


    다녀온 뒤에 늘 새로운 걸 알고 아쉬워하는 게 여행이다. 그래서 갔던 곳엘 다시 찾아가게 되는 것이다. 지난번 수승대, 황산마을, 동계 정온 고택, 반구헌 여행도 그랬다. 시간에 쫓겨 동계 정온 선생의 모리재(某里齋)를 가보지 못한 것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나는 그곳에 대한 정보들을 다시 모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것들을 알게 되었다. 그곳의 바위들에 대한 자료는 놀라웠다. A4 용지로 장장 34페이지에 달했다. 갖가지 전설을 간직한 바위들이 마리면과 위천면, 북상면 지역에 분포해 있었다.

    월요일- 비가 온다는 정보가 있었지만 나는 무시하고 길을 나섰다. 위천면 소재지에서 좌측, 피서지로 소문난 금원산 휴양림 근처엔 우리나라에서 단일바위로는 가장 크다는 문바위가 있다. 그 문바위 아래엔 유안청폭포가 있고, 그 위엔 가섭암지가 있다. 가섭암에 새겨진 마애삼존불을 처음 만났을 때의 설렘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곧이어 수승대를 지난다. 이번에 새로이 알게 된 건 장주압(藏酒押)이다. 옛 사람들이 경치를 즐기며 견식을 기르고 놀이를 통해 양덕을 길렀던 곳의 ‘술동이’가 바로 장주압이었던 것이다.

    자, 이제 오늘의 목적지인 북상면이다. 오른쪽, 송계사 길로 가자. 사모바위, 관석, 탕건바위를 만나야 한다. 나는 속도를 줄여 천천히 시골길을 간다. 은진 임씨 고가가 있고, 갈천서당이 있고, 그런데 도대체 그 바위들은 어디에 있지? 나는 조수석 차창을 내리고 길가에 퍼질러 앉아 있는 할머니 두 분께 탕건바위 가는 길을 묻는다. 할머니들은 가는 길로 십 리는 더 가란다.

    길가에 석탑 하나가 보인다. 갈계리 석탑이다. 조금 더 가니 저만큼 사당 같은 게 보이고 그 뒤에 각자(刻字)가 새겨진 바위가 보인다. 맞다, 관석(冠石)이다. 나는 차에서 내려 그 돌을 살펴보았다.

    바위 가운데서도 으뜸가는 바위는 선비의 갓을 상징하는 관석(冠石)이라고 한다. 관석은 의관을 잘 갖추어 입은 선비의 갓을 연상케 하는 바위다. 북상면 갈계리는 거창 신씨와 쌍벽을 이룬 은진 임씨의 본거지였다. 자손들에게 정기와 영화를 물려주고픈 간절한 소망이 이렇듯 바위 하나에도 의미를 부여하고 그 뜻을 새겼을 것이다. 산골 선비의 갓, 관석은 여전히 갈계리 중산마을의 지킴이다.

    관석 앞 운강재(雲岡齋)는 굳게 닫혀 있었다. 열어볼 수 없는 옛집은 늘 아쉬움으로 남는다. 우리는 그 맛에 여행을 한다.

    운정리 개삼불 마을로 가자. 개삼불(介三佛) 마을은 임진왜란 때 부처 셋을 피란시킨 데서 그 지명이 유래했다고 한다. 그런데 탕건바위는 도저히 못 찾겠다. 어쩔 수 없다, 이럴 땐 묻는 게 최고다. 나는 콩밭 매는 할머니께 묻는다.

    탕건바위는 개삼불마을 조금 못미쳐 알루미늄 가드레일 밖 풀더미 속에 처박혀 있다. 탕건바위는 그 의미를 모른다면 그냥 휙 지나쳐버릴 만큼 형편없는 돌덩어리에 불과하다. 탕건바위는 탕건을 쓰고 손님을 맞이한다는 뜻의 바위다.

    여기서 비하인드 스토리 하나. 1996년 1월, 다시 이 자리로 탕건바위가 돌아오기까지의 우여곡절이다. 송계사 도로 확장포장공사 때의 일이었다. 마을사람들도 모르게 바위가 없어졌다. 그런데 결코 무심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 마을의 이삼 십대 젊은 청년들이 끝없이 죽어나갔기 때문이다. 마을사람들은 뒤늦게 탕건바위를 건드려서 일어난 일임을 알았다. 수소문 끝에 도로공사를 했던 포클레인 기사가 가져갔다는 것을 알았고, 되찾아와 지금의 제자리에 세우고 고사를 지냈다. 그리고 액운은 멈추어졌다. 믿거나 말거나.

    관석이랑 탕건바위는 찾았다. 그런데 사모바위는 어디 있지? 되돌아 내려오니 저만치 산등성이에 예사롭지 않은 바위 하나가 보인다. 갈천서당 앞에 차를 세우고 건너편 산마루를 올려다본다. 각도에 따라 모양이 달라지기도 해서 모양이 정확하진 않지만 맞는 것 같다. 사모바위는 두 개의 큰 바위가 겹치어 사모(紗帽) 모양을 이룬다. 사모란 관복을 입을 때 쓰는 벼슬아치의 모자인데 지금은 구식 혼례 때 신랑이 쓰는 오사모를 말한다. 그 모양새는 앞머리 부분이 둥그스름하고 뒷부분이 불룩 솟아 있으며 양옆으로 날개를 달고 있는 게 특징이다.

    그런데 지금 이 사모바위는 양 날개가 없다. 전설에 따르면 이 바위로 인해 벼슬아치와 효자 열부가 많이 나왔는데 이를 시기한 이웃 고을 사람들이 양 날개를 부숴버렸다고 한다. 텔레비전 ‘전설 따라 삼천리’에 나왔다. 뿔 모양의 바위 한쪽을 내리치자 피 묻은 봉황새 한 쌍이 날아 나왔으며, 그중 수컷은 갈천동(치내)으로, 암컷은 아래쪽으로 날아갔고, 뿔이 떨어진 곳에는 봉황의 핏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향지에도 적혀 있다.

    마을 앞 정자에서 더위를 피하고 있던 할머니들께 이 사모바위에 대해 묻자 그중 한 분이 그 이웃고을 사람들이란 다름 아닌 위천면 황산마을 신 씨들이었다고 했다. 세월이 흐르고 또 흘렀건만 수승대의 소유권을 두고 다투던 요수 신권 선생의 신 씨와 갈천 임훈 선생의 임 씨와의 반목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었다.

    나는 다시 북상삼거리에 섰고, 월성계곡 쪽으로 길을 잡았다. 농산리 고인돌은 월성천 지암대(支岩臺) 개울가에 있다. 혹자는 “에게, 이게 뭐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건 돌 하나에도 다 의미가 있다는 걸 모르는 데서 비롯된 말이다. 선사시대 주거문화와 무덤들은 오늘날의 풍수지리와는 사뭇 다른 점이 있었다. 오늘날의 무덤들은 산줄기를 따라 세로쓰기인데 반해 옛 사람들의 무덤은 가로쓰기가 많았다. 마치 태극 팔괘를 벌여놓은 듯 가로쓰기가 되어 있는 농산리 고인돌도 마찬가지다. 농산리 고인돌은 매우 단단한 화강석으로, 상판에 칠성(七星)이 그려져 있다. 지석으로 고인 네 개의 돌은 풍수지리상 동서남북을 상징한 비보(裨補)기능처럼 보이기도 한다.

    농산리 석조여래입상(보물 1436호)은 고인돌 근처 다리를 건너 800m쯤 가면 있다. 도로가에 작은 안내판이 있고, 그 안내판 뒤로 돌계단이 있는데 거기로 올라가면 된다. 사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인상에 깊이 남았던 건 이 석조여래입상이다. 마음이 환해진다는 말을 실감했던 순간이었다. 나는 불자가 아니지만, 이 불상을 만난 기쁨은 참으로 컸다. 훤칠한 키에 잘 생긴 외모. 농산리 석조여래입상 앞에선 누구라도 다 사로잡히게 되어 있다. 광배를 두른 부처는 홀로 외진 산 속에 있어도 그랬다. 맑고 복스러운 얼굴, 알 듯 말 듯한 미소, 통통한 볼살, 지그시 다문 입술, 크고 잘 생긴 귀, 미남이 갖추어야 할 이목구비를 이 석조입상은 모두 갖추고 있었다.

    자, 이제 강선대(降仙臺)로 가자. 강선대는 말 그대로 신선이 내려와 놀던 곳이다. 모암정(帽岩亭) 앞 다리를 건너면 있다. 그런데 쉽게 눈에 띄지도 않고 “어, 이거 별거 아니네!” 싶다. 그러나 모르는 소리, 지금은 이래저래 주변 풍경이 많이 바뀌었지만 그 옛날엔 지금과는 매우 달랐을 것이다.

    강선대에서 산속으로 조금만 더 올라가면 동계 정온 선생의 모리재(某里齋)가 있다. ‘내가 어디로 갔냐 물으면 모르는 곳으로 갔다’고 대답하라고 이른 것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동계 정온 선생은 선조 2년(1569)에 나서 문과에 급제, 여러 벼슬을 지내고 제주도에 10년간 유배되었으나 인조반정으로 다시 관계에 나갔다가 병자호란 때 척화를 주장하고 낙향한 이 지역의 대표적 인물이다.

    강선대 건너는 모암정이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 정자가 개인의 소유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허브농장의 소유로 되어 있는 모암정은 지금 철저히 철제울타리로 둘러쳐져 있다. 모암정은 모암(帽巖) 임지예(林之藝)가 지은 것으로, 현판은 ‘고종실록’, ‘순종실록’ 편찬의원을 지낸 남규희(南奎熙)가 쓴 것이다. 매우 힘차고 큰 글씨다. 모암정은 어디 내놓아도 손색이 없는 풍모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 개인의 소유다.

    다음은 창선리 분설담(憤雪潭)이다. 옛 선비들이 찾아와 분설담 맑은 물로 마음을 씻었다는 곳. 물보라가 마치 눈보라 같다는 분설담은 동춘당 송준길 선생이 지은 이름이다. 여전히 너른 반석 위로 맑디맑은 월성계곡 물이 흐른다. 흐르다 부서지고, 모였다 흩어진다. 주변에 깎아지른 절벽이 있고 활엽수들이 있어 단풍철에 오면 그야말로 천하절경이겠다.

    분설담 폭포 위엔 누군가 성혈(性穴)을 파 놓았다. 명산대천에 아들 하나 점지해 달라고 빌었던 누군가의 염원이 담긴 것일 게다. 이른바 기자소(祈子所)인 것이다.

    분설담을 지나면 곧바로 산수리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만난다. 거기 바위벼랑 하나가 있는데 순암이다. 순나물 순자와 바위 암자를 쓴다. 순나물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순암이라 한다고 향지에는 적고 있다.

    순암을 지나면 별빛마을 혹은 하늘마을로 통하는 월성이다. 농촌체험마을로 자리매김한 월성을 지나면 오늘의 종착지 황점마을이다. 황점은, 쇠를 만드는 곳이 있었으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월성에서 황점으로 가는 길에 오늘의 최종 목적지인 사선대(四仙臺)가 있다. 거창읍에서도 30㎞, 멀고도 먼 곳이다. 사선대는 옛 원학동 산수의 백미였다. 사선대는 자연이 만들어낸 최고의 걸작품이다.

    사선대는 병자호란을 피해 월성계곡에서 마음을 씻고 지낸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선생이 은거한 곳이다. 그래서 송기(宋基) 혹은 송대(宋臺)라 불렀다. 그러다 1909년 고조의 5남 의친왕 강(堈)이 승지 정태균을 찾아와 머물며 북상 위천 지방의 청년들과 만나 의병의 근거지로 삼으려고 준비하던 중 일제에 의해 발각된 곳이어서 사선대(思璿臺)라 부르던 것을, 대암(臺岩)이 네 개이고 돌 위에서 신선이 바둑을 두었다는 전설이 있어 사선대(四仙臺)라 부르게 되었다.

    사선대 맨 위쪽의 바위는 마치 거북 모양 같기도 하고 봉황새 모양 같기도 한데 그 머리 부분이 남덕유산을 바라보고 있다. 1770년경 진주 소촌찰방을 지낸 진재 김윤겸이 이곳을 찾아와 진경산수화 ‘송대’를 그렸다.(동아대박물관 소장).

    또 18세기 화가 김희겸(김희성)도 ‘안음 송대’라는 제목으로 이곳의 풍경을 그렸다. 그 수묵화는 지금 일본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희겸이 그린 이 그림은 1995년 6월 8일자 조선일보 제1면 좌측 상단에 컬러사진으로 소개되었는데 ‘안음(安陰) 송대(宋臺)’라는 제목의 그림에 표암 강세황이 쓴 역기심(亦奇甚)이란 글씨가 곁들여져 있다. ‘송대의 풍경이 매우 기이하다’라는 뜻이다. 이 그림은 거창 향지의 배면 사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거창군 북상면은 남덕유산 아래 깊숙이 위치한 천하의 절경이다. 그러나 깊은 산속 계곡의 아름다움은 푸른 숲과 하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깊은 산속 계곡은 물과 바위의 어우러짐으로 계곡다워진다. 그리고 은거했던 옛 선비의 자취가 깃들어져 더욱 의연해지고 결연해진다.

    부드러움의 대명사인 물은 하염없이 흘러간다. 흘러가며 바위를 깎고, 제 자신을 깎고 정화한다. 단단함의 대명사인 바위는 요지부동, 꼼짝도 하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고, 경거망동하지 않고, 기웃거리지 않고, 깨지더라도 제 자리에서 온전히 깨지는 것이 바위다. 바위의 눈은 이 세상 흔들리는 것들을, 흘러가는 것들을 꿈쩍도 않고 지켜본다. 입이 있지만 절대로 입을 열지 않는 것이 바위다.

    여기에 살던 옛사람들이 여유자적, 산과 물과 바람과 구름과 바위를 노닐며 즐긴 것 같지만 아서라, 태산 같고 바윗덩이 같던 그 옛사람들이 보던 것은 그런 여유로움만은 아니었으리. 관직에 나아갔지만 상처를 입고 돌아와 이 깊은 산골에서 심신을 달랬을 그들의 분노와 자조와 통한을 나는 월성계곡 깨끗한 바위 위에 앉아 조용히 떠올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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