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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비경 100선] (17) 함양 화림동 계곡 거연정

바위 위에 살며시 내려앉은 정자
울퉁불퉁 바위 생김새 따라 높낮이 다른 기둥 세워
정자 그 자체만으로도 아슬하면서도 아름답다

  • 기사입력 : 2013-05-09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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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함양 화림동 계곡 초입에 위치한 거연정은 덕유산에서 발원한 맑은 계곡물과 매끄럽고 너른 화강암이 인상적이다./김승권 기자/


    큰 계곡 한가운데 바위들이 모여 만들어진 정원에 정자가 위태롭게 서 있다. 울퉁불퉁한 바위를 깎아 편평하게 만들지 않고 바위의 생김새에 맞춰 목재를 잘라 기둥을 세워 자연 친화가 잘 드러난다.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이면 정자가 떠내려갈지도 모른다는 아슬아슬함이 정자의 존재를 더욱 인상깊게 한다.

    정자 옆에는 소(沼)처럼 잔잔한 물이 흐르고 있다. 물속을 들여다보면 푸른색 쪽빛을 띠고 있어 깊이를 가늠하기 힘들다. 선조들은 이 물을 ‘방화수류천(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간다)’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 물 위로는 정자로 갈 수 있는 구름다리(화림교)가 놓여져 운치를 더한다. 철로 만들어진 구름다리를 걸으면 절경에 맞지 않게 삐거덕 소리가 나 아쉬움을 준다.

    정자 위에 올라서면 널따란 하천을 흐르는 청잣빛 계곡물과 백옥같이 흰 바위, 그리고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팽나무 물푸레나무 등 수령 300년이 넘는 고목들이 한데 어우러져 한 폭의 산수화가 연출된다. 함양 화림동 계곡 정자 중 주변 경치가 단연 으뜸으로 꼽히는 거연정에 대한 얘기다.

    함양군 서하면 봉정리 선비문화관 앞에 있는 거연정은 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숙이 소요하던 곳으로 후손 전재학 등이 1872년에 세웠다.

    거연정에서 다시 100m 아래로 내려오면 영귀대라는 너럭바위에 세워진 정자를 만난다. 군자정이다. 단청 하나 없이 무채색으로 일관한 모양새에서 무뚝뚝함도 느껴지지만, 보면 볼수록 소박하고 남성적인 호방함이 가슴에 와닿는다. 거연정에서 흘러내린 물은 군자정 앞에서 부서지고 흩어지며 물길이 커진다. 웅장한 물소리와 하얀 물거품이 동반되면서 세상에 나아가는 군자의 모습과도 같다.

    군자정 맞은편 하천가에는 층층이 쌓여진 바위 위로 오래된 소나무와 정자나무 등이 분재를 해놓은 것처럼 서 있어 눈길을 끈다. 조선의 5현으로 꼽히는 일두 정여창 선생이 안의현감으로 있을 때 벗들을 불러 이곳에서 시를 짓고 담소를 나눴다고 한다. 후세에 전세걸이라는 선비가 정여창 선생을 군자라 칭하며 정자를 세웠다.

    해발 1507m 남덕유산에서 발원한 남천(남강의 상류)이 함양군 서하면과 안의면을 지나면서 만들어낸 골짜기인 화림동 계곡은 정자와 주변 경관의 만남이 어떤 비경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 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오랜 세월 물이 흐르면서 만들어낸 여러 모양의 기암괴석과 매끄러운 화강암 반석 위를 흐르다 곳곳에 도자기를 빚듯 만들어진 소나 담이 나타난다. 이들이 한데 어우러진 곳에는 너른 반석 위에 정자가 들어앉아 주위의 나무들과 조화를 이뤄 한 폭의 산수화 같다. ‘물 좋고 경치 좋은 곳에 정자가 들어선다’는 선조들의 얘기가 빈말이 아님을 증명한다.

    조선시대에 과거를 보기 위해 먼 길 떠나는 영남 유생들이 덕유산 육십령을 넘기 전 지나야 했던 길목인 화림동 계곡은 본래 팔담팔정(八潭八亭)이라고 해서 여덟 개의 소와 여덟 개의 정자로 유명하다. 이 때문에 이곳은 소쇄원 등 남도 정자를 대표하는 전남 담양의 정자와 견줘 영남 정자의 진수를 보여주는 곳으로 얘기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거연정·군자정·동호정의 모습만 볼 수 있다. 농월정도 남아 있었지만 아쉽게도 2003년 화재로 소실됐다. 고색창연한 이들 정자 사이사이 자리 잡은 남천정·경모정·영귀정은 모두 최근에 지어진 정자들이다.

    선비들이 지나쳤던 화림동의 숲과 계곡, 정자의 자태를 직접 체험할 수도 있다. 화림동 계곡을 따라 나무와 돌로 2006년 오솔길을 놓았다. 거연정-군자정-동호정-농월정터를 잇는 6㎞가 조금 넘는 이 길은 ‘선비문화탐방로’로 명명됐다. 계곡을 끼고 걸어가면 물소리에 취하고 경치에 흠뻑 빠진다.

    거연정과 군자정을 거쳐 2㎞ 정도 내려오면 동호정이 나온다. 이곳에선 계곡 한가운데 100명은 충분히 앉을 수 있는 너럭바위(길이 60m, 넓이 40m)가 눈에 들어온다. 해를 가릴 정도로 넓은 바위라는 뜻의 차일암(遮日岩)이다. 이곳에는 노래 부르는 장소, 악기를 연주하는 곳, 술을 마시며 즐기는 곳이라는 표시가 새겨져 풍류를 즐기던 곳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바위 앞 옥녀담에는 옥색빛을 띤 물이 묘한 풍치를 자아내고 맞은편 산쪽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서 있다. 정자에서 돌징검다리를 타고 너럭바위를 지나 아래쪽으로 조금 가면 100년 이상 된 소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선 송림도 만날 수 있다. 동호정은 동호 장만리가 관직에서 물러난 뒤 유영하던 곳으로 후손이 1890년에 건립했으며, 화림동 계곡의 정자 중 가장 크고 화려하다.

    탐방로 마지막 지점인 농월정은 ‘밝은 달밤에 한 잔 술로 계곡 위에 비친 달을 희롱한다’ 해서 이름 붙여질 정도로 절경을 자랑했다. 하지만 지난 2003년 화재로 소실되면서 그 아름다움의 빛을 잃고 말았다.

    비록 정자는 불타 없어졌지만 울창한 송림이나 계곡물을 끼고 방대하게 펼쳐진 너럭바위(월연암)의 모습은 여전히 장관이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월연암은 크기가 약 1000평 규모이고 펑퍼짐하다. 바위 곳곳에 움푹한 웅덩이가 여럿 있다. 옛 선비들이 바위에 난 웅덩이에 막걸리를 붓고 꽃잎이나 솔잎을 띄워 바가지로 퍼 마시며 풍류를 즐겼다는 일화가 내려온다. 풍류를 즐기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도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 바위에 앉은 연인들 앞으로 흘러가는 맑은 물소리에 흥취가 더해진다.

    조금만 지나면 폭염으로 푹푹 찌는 한여름이다. 시원한 곳을 찾는 사람들이라면 화림동 계곡을 찾아서 더위도 식히고 주변의 경관과 어우러진 정자의 매력에 빠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이명용 기자 my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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