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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4일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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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45) 배한봉 시인이 찾은 하동 화개장터

추억을 파는 이곳… 알지예? 있을 건 다 있다는 거

  • 기사입력 : 2013-05-02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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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장간 풍경.
    화개장터 앞 섬진강 나루터 자리에 만들어진 남도대교.



    여행의 목적은 다 다를 수 있다. 경치를 느끼고 정을 느끼고 사람 사는 냄새를 느끼고 싶을 때 퍼뜩 떠오르는 곳은 시골장이다.

    오일장은 요즘도 지역 곳곳마다 펼쳐지지만 경치와 정, 사람 사는 냄새를 한꺼번에 느끼면서 다양한 풍물을 만날 수 있는 곳으로는 하동의 화개장터를 빼놓을 수 없다.

    “이거 얼맙니꺼?”

    “아따, 말만 잘하모 공짜로도 드립니더.”

    구수한 입담과 경상도 사투리가 정겨움을 더하는 곳 화개장터.

    “전라도와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섬진강 줄기 따라 화개장터엔~” 조영남이 흥겨운 목소리로 노래 불러 한국 사람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곳이기도 하다.

    있어야 할 건 다 있고 없을 건 없다는 이곳, 봄이면 화개 십리벚꽃과 매화를 보러 온 관광객들이 꼭 한 번 들렀다 가는 필수코스다.



    화개장터 가는 길은 섬진강 줄기 따라 이어져 있다. 섬진강은 지리산 골짜기마다 스며들어 있는 전설과 역사와 애환을 모아 남해로 흘려보내는 강. 그래서 송수권은 그의 시 <지리산 뻐꾹새>에서 “지리산 하/ 한 봉우리에 숨은 실체의 뻐꾹새가/ 한 울음을 토해내면/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또 뒷산 봉우리 받아 넘기고/ 그래서 여러 마리의 뻐꾹새로 울음 우는 것을/ 알았다.// 지리산 중/ 저 연연한 산봉우리들이 다 울고 나서/ 오래 남은 추스림 끝에/ 비로소 한 소리 없는 강이 열리는 것을 보았다.// 섬진강 섬진강/ 그 힘센 물줄기가/ 하동 쪽 남해를 흘러들어/ 남해군도의 여러 작은 섬을 밀어올리는 것을 보았다”고 했을 것이다.

    맑은 강물과 눈부시게 흰 모래밭, 강바람에 휘청대는 벚나무들, 대숲들…. 김용택에 의해 <섬진강> 연작 등 많은 시가 태어나기도 했던 아름다운 강, 섬진강을 보는 재미는 화개장터가 주는 공짜 선물이다. 그뿐인가. 지리산이 품은 쌍계사 관람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 중 하나다.

    화개장터는 행상선(行商船) 돛단배가 들어올 수 있는 가장 상류 지점에 위치한 지리적 특징으로 인해 조선시대 때부터 지리산 일대 산간마을과 남해를 이어주는 상업중심지 역할을 했다. 해방 후까지 명맥을 유지해오다 6·25전쟁 이후 빨치산 토벌 등으로 지리산 자락 마을들이 황폐해지면서 쇠락의 길을 걸었다. 지금의 화개장터는 옛날의 화개장 명성을 회복하기 위해 2001년에 그 터를 복원 개장한 재래식 시장이다. 화개시장이라고도 하지만 옛 명칭을 그대로 써서 화개장터라 부른다. 하동포구 팔십 리가 시작되는 화개면 탑리에 있다. 화개천이 섬진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의 마을이다.

    화개장터에 들어서자 주말이라 그런지 관광객들이 북적거린다. ‘화개장터’라고 쓰인 표지석과 화개장터의 유래 및 <화개장터>노래 가사를 적은 석조물, 역마상과 옛 보부상의 조형물이 군데군데 서 있다.

    역마상은 김동리의 소설 <역마(驛馬)>를 주제로 형상화한 조형물이다. 1948년 <백민>에 발표된 <역마>는, 역마살로 대변되는 운명에 순응함으로써 인간 구원에 도달할 수 있다는 문학관이 깔린 소설이다. 이 소설을 토대로 화개장터에서 신성일, 남정임 등이 주연을 맡은 영화 <역마>(감독 김강윤, 1967)를 촬영하기도 했다.

    초가지붕으로 이루어진 전통 장옥, 장돌뱅이들의 저잣거리와 난전, 주막, 대장간 등 옛 시골장터의 모습은 나를 어린 시절로 데려다 놓는다. 시골 출신인 나는 어릴 때 자주 조부모님이나 어머니 따라 장 구경을 다녔다. 막대사탕을 입에 물고 옷가게며 소시장을 돌아다니다 지칠 때쯤 먹던 장터국밥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추억 속 예닐곱 살 소년이 되어 이곳저곳 장터를 기웃거리는 재미가 참 쏠쏠하다. 장터국밥집이 늘어선 골목에 이르자 구수한 음식냄새가 점심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자꾸 허기를 불러온다. 뻥튀기 과자를 뜯어먹으며 약재며 나물을 파는 가게 앞에 선다. 느릅나무, 겨우살이, 헛개가지, 빼빼목, 우슬, 야관문, 골담초, 토사자, 접골목, 창출, 취나물, 곤드레나물 등등 눈에 익은 이름도 있지만 낯선 이름도 수두룩하다. 지리산과 섬진강에서 나는 특산물이다.

    장터 왼편에 자리 잡은 대장간에 발길이 오래 머문다. 초로의 대장장이 아저씨는 쉼 없이 괭이며 호미, 낫 같은 연장을 만들어낸다. 벌겋게 달아오른 쇳덩이를 망치로 두드려 펴서는 물에 식히고, 다시 불에 달궈 모양을 잡아가는 과정을 반복하다 어느새 뚝딱 농기구 하나를 만들어낸다.

    농기구들을 보니 옛 고향집이 눈앞에 선하다. 외양간 옆 창고에는 써래며 쟁기, 새끼틀, 가마니틀은 물론 낫이나 호미, 쇠스랑, 괭이 같은 농기구들이 잘 정리돼 있었다. 농촌에서는 농사짓는 연장만큼 소중한 것 없기도 하지만, 사소한 물건도 소중히 여기는 습관과 근검절약 정신을 생활화했다. 값비싼 자동차도 3~4년 주기로 교체하는 현대인들의 삶의 자세를 돌아보게 된다.

    관광객들은 도시에서는 쉬 볼 수 없는 광경에 눈길을 거두지 못한 채 나처럼 추억여행을 하듯 돌아다니고 있다. 사진을 찍으며 옛 풍물을 마음에 담느라 분주하다. 풍물 구경에 취해 있다 보면 깜빡, 놓치기 쉬운 것이 있다. 장터 입구 왼편 작은 공원에 있는 화개장터삼일운동기념비가 그것이다. 여전히 과거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의 침략 역사관을 되새기지 않을 수 없다.

    뼈아픈 우리 역사의 발자취까지 숨 쉬고 있는 화개장터는 이제 문화의 꽃을 피우는 곳으로 자리매김되고 있다. 매년 4월 초에 펼쳐지는 벚꽃축제도 대단하지만, 김동리의 소설 <역마>를 주제로 한, 5월의 화개장터 역마예술제도 놓칠 수 없는 볼거리다. 하동 야생차문화축제 기간에 맞춰 마당극과 판소리 공연 등이 펼쳐진다. 화개장터 인근 평사리에 있는 박경리 소설 <토지>의 주무대인 최참판댁, 북천에 있는 이병주문학관도 꼭 한 번은 들러야 할 명소다.


    다들 미친 사내라 했다// 불그죽죽 꽃물이 드는 19번 국도를/ 산발한 머리 늙수그레한 걸망을 짊어지고/ 낭창한 노래 해맑은 웃음을 흘리며/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사내// (한때 저 사내도 치열하게 오르려했던 목표는 있었겠지/ 강처럼 흐르지 못하고, 무엇이 막혔던 걸까?)// 오늘도 다 저문 길 위에서 거침없이/ 뱉어내는 저 도도한 웃음/ 도 다 통했을 것만 같은 꽃 같은 웃음을 베어 물고/ 낭창낭창한 가락을 섬진강 위로 흩는다// 해거름 강위로 얹히는 노을마냥/ 사내의 웃음이, 노래가, 강 위로 환하다// 얼굴가득 꽃 같은 웃음을 베어 물고/ 늙수그레한 吹毛劍처럼/ 둘러메고 강을 거슬러 오르는 저 사내/ 더러는 팔자 좋은 놈이라고도 했다 -최영욱, ‘섬진강 블루스’


    지리산처럼 섬진강처럼 살고 싶어 하는 하동 토박이 최영욱 시인의 시를 떠올리며 다시 섬진강 가로 나온다. 나룻배 대신 남도대교가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고 있다. 산과 산 사이를 비집고 유장하게 흐르는 섬진강 풍경이 한 폭 그림 같다.

    오늘 화개장터 와서 문학과 역사, 노래가 같이 숨 쉬고 있음을 새삼 확인했다. 김동리의 단편 <역마>에 보이는 시골 장터 특유의 흥성함, 그리고 조영남의 노래 <화개장터>에서 들을 수 있는 짙은 신명과 정겨움을 느끼며 노래 불러본다. 있어야 할 건 다 있구요 없을 건 없답니다 화개장터~.

    글·사진= 배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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