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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비경 100선] (15) 남해 물건리 방조어부림

숲에 안기는 바닷바람

  • 기사입력 : 2013-04-25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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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해군 물건리 방조어부림. 8만2000여 그루의 나무들이 호위병처럼 늘어서서 바다와 육지를 가르며 서 있다./전강용 기자/


    사방천지, 봄기운이 스멀거리고 있었다. 하늘도 땅도 바람도 햇볕도 겨울 찌꺼기를 털어내고 있었다. 얼음장같이 차가웠던 바다도 온기를 되찾은 듯했다. 해무(海霧)가 잔뜩 밀려오고 있다. 사람이 사는 땅을 향해, 따스하고 부드러운 습기를 가득 머금은 채 슬금슬금 다가오고 있었다. 마치 커다랗고 높은 망사 커튼이 드리워지는 모양새다.

    해무(海霧)를 막아선 것은 한 무리의 숲이었다. 둑방처럼 적당한 길이에다 높이와 폭을 갖춘 나무들이 호위병처럼 늘어서서 바다와 육지를 가로막고 서 있다.

    겨우내 바다에서 불어오는 칼바람에 시달린 탓인지 아직 무성하지는 않았지만 가지마다 새잎을 뭉텅뭉텅 내고 있었다.

    가만히 보니 녹색 중 가장 아름답고 부드러운 연둣빛이다. 연둣빛 나무들은 말발굽 같은 해안선을 가로질러 땅과 바다를 정확하게 이등분하고 있다.

    가까이 가 보니 폭도 꽤나 넓다. 또 키가 큰 나무 아래로 작은 나무들이 자리하고 있다.

    큰 나무와 작은 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벽(壁)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남해 물건리 방조어부림(防潮魚付林)이다.

    어부림이란 어군(魚群)을 유도하기 위해 해안 등지에 나무를 심어 가꾼 숲이다. 이곳 숲은 물고기를 모으는 것보다 마을과 농작물을 풍해에서 보호하는 방풍림 역할이 더 크다고 한다.

    길이 1500m, 너비 30m 정도로 숲의 높이는 10~15m, 수목의 수는 상층이 2000주, 하층이 8만여 주 정도다.

    숲의 상부는 팽나무, 푸조나무, 상수리나무, 참느릅나무, 말채나무, 이팝나무, 무환자나무, 아카시아, 후박나무 등이고, 그 아래는 산딸나무, 때죽나무, 소태나무, 모감주나무, 광대싸리, 까마귀밥나무, 백동백나무, 생강나무, 찔레나무, 초피나무, 갈매나무, 쥐똥나무, 누리장나무, 붉나무, 보리수나무, 두릅나무, 병꽃나무, 화살나무 등이다.

    또 그들 사이로 인동덩굴, 담쟁이덩굴, 새머루, 줄딸기, 청미래덩굴, 청가시덩굴, 댕댕이덩굴, 복분자딸기, 노박덩굴, 개머루, 송악 등의 덩굴식물이 자리하고 있다.

    나무의 수와 종류는 어디까지나 문헌상의 얘기다. 하나하나 확인할 수 있는 지식이 있다면 좋겠지만, 그냥 숲 전체를 쳐다봐도 충분히 즐겁다.

    숲에는 이곳 옛사람들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나무들은 각자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도록 짜여졌다.

    큰 나무는 거센 바람의 기운을 꺾고, 그 밑의 중간 나무들은 듬성한 나무들 사이를 빠져나오는 바람을 막는다. 바닥에 깔린 덩굴나무들은 바람과 맞부닥치는 나무의 흔들림을 막아주고, 동시에 숲을 한 덩어리로 묶는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숲이 조성된 지 300년이 됐다고 하니, 오랜 시간을 온전하게 버텨낸 것은 각자의 임무에 충실했기 때문이리라.

    전해 오는 얘기로는 19세기 말엽 숲의 일부를 벌채했다가 그해 폭풍을 만나 큰 피해를 입은 뒤, 이 숲을 해치면 마을이 망한다고 생각해 나무를 베는 사람에게 벌금을 부과했다고 한다.

    또 1933년 큰 폭풍이 있었는데, 이웃 마을은 농작물과 집들이 큰 피해를 입었지만 이곳 마을은 조금 피해를 보는 데 그쳤다고 한다.

    근대에 들어서는 일제강점기 말엽 일본인들이 목총을 만들기 위해서 이 숲의 느티나무를 자르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숲을 없애겠다면 차라리 우리를 죽여달라고 맞섰다고 한다.

    그만큼 이 숲이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존재였고, 마을 주민들도 숲을 애지중지했음을 알 수 있다.

    옛 모습을 지켜온 방조어부림은 지난 1962년 천연기념물 제150호로 지정됐다.

    숲 앞쪽 해변에는 굵은 몽돌이 깔려 있어 운치를 더하고, 오목한 포구에는 어선들이 어머니 품안에 안긴 아기처럼 평화롭게 머물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얼마 있지 않아 숲에 하얀 눈꽃이 핀다고 한다. 아마도 이팝나무나 아카시아가 꽃을 터뜨리는가 보다.

    숲 뒤편 산쪽은 사람이 사는 곳이다. 밭과 논이 있고 집들도 옹기종기 모여 있다. 남자들은 바다로 나가고, 여인들과 아이들은 논과 밭을 일구며 알콩달콩 살았으리라.

    바다와 숲이 어우러진 빼어난 경치 덕분에 최근 들어 펜션이며 휴양시설이 군데군데 들어서고 있지만 아직은 이전 모습을 떠올리기 어렵지 않다.

    숲 뒤편 산쪽으로 또 다른 볼거리가 있는데, 2001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독일마을이다. 1960년대 독일에 파견돼 우리나라 경제발전에 기여한 독일 거주 교포들이 고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삶의 터전을 제공해주고, 독일의 문화를 경험하는 관광지로 개발하기 위해 조성된 곳이다.

    하얀색 건물에 오렌지색 지붕을 이고 있어 정갈하고 이국적인 정취를 풍기고 있다.

    이곳까지 숲을 지난 순한 바람이 올라오고 있었다.

    이문재 기자 mjlee@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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