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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04월 20일 (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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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을 가다] 작가와 떠나는 경남 산책 (40) 배한봉 시인이 찾은 진해

지금 진해는 분홍빛 향기로 무장한 벚꽃나라 병사들이 점령했다

  • 기사입력 : 2013-03-28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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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창원시 진해구 경화역에 27일 오후 관광객들이 화사하게 만개한 벚꽃을 즐기고 있다.
    남원로터리에 있는 김구 선생 친필 시비.
    사적 제291호 진해우체국 건물.




    봄이 깊어졌다. 남녘 끝에서 밀려온 꽃소식에 옷차림이 가벼워졌다. 3월 초중순까지만 해도 변덕 심했던 날씨였다. 봄을 가장 빨리 느끼게 하는 것은 꽃이다. 창원시 진해 전역에서는 오는 4월 1일부터 열흘간 제51회 군항제가 열린다. 통상적으로 이 기간에 진해 벚꽃은 절정을 이룬다. 나는 오늘 미리 진해로 그 벚꽃 구경 간다.

    벚꽃은 화려하게 피지만 지는 모습도 매우 인상적이다. 꽃잎이 얇고 작아서 하나하나 흩날리며 떨어진다. 미풍이라도 불면 그 꽃잎들 무더기로 쏟아져 꽃비라는 말 무색하지 않다. 봄비가 내리면 막 돋기 시작한 푸른 잎만 남기고 꽃들은 일제히 투신해 지상을 꽃바다로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은 벚꽃을 보며 젊음의 정점을 간직한 채 늙어가는 삶을 떠올리기도 한다. 활짝 흐드러지게 피어 화려하게 빛났으나 잠깐 뒤돌아보는 사이 사라지고 없는, 가장 아름다운 날의 한판 춤사위. 그 덧없는 황홀함으로 우리를 더 눈물 나게 하는 꽃이 벚꽃이다.

    진해의 벚꽃은 일제강점기에 심은 것이 시작이다. 때문에 해방 이후 일본 국화라며 주민들이 벚나무를 없애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해의 벚나무들이 제주도가 자생지인 왕벚나무로 밝혀지면서 벚나무 가꾸기에 들어갔다. 지금은 진해 전역에 35만여 그루 벚나무가 자라고 있다. 진해 벚꽃 명소는 안민고개, 경화역, 여좌천변, 내수면환경생태공원, 해군사령부 등지이다. 안민고개 마루에 올라서자 거대한 항아리처럼 만(灣)을 이룬 진해 해안선이 보이고, 대죽도가 코앞으로 다가온다. 역시 여행지 풍광은 높은 곳에서 전체를 먼저 조망해야 제맛 느낄 수 있음을 실감한다. 구불구불 운치 있게 휘어진 고갯길 따라 터널을 이룬 벚나무들이 분홍빛 꽃망울 한껏 부풀리고 있다. 벚꽃은 폭죽처럼 한꺼번에 터진다. 며칠 뒤면 장복산이 품고 있는 저 진해는 온통 분홍꽃밭 될 것이다.

    봄이 온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거제에는 동백꽃 만발하고, 섬진강변에는 곧 매화잔치 벌어진다는데, 우리 삶은 언제 화개(花開)하게 될까. 1인분의 자유, 1인분의 평화가 없듯 1인분의 개화도 없을 것이다. 몇 토막 생각을 끌고 가는 사이 어느새 경화역이다.

    “그리우면 그냥 그리워해요. 그리움도 끝이 있고 바닥이 있지 않겠어요?” 드라마 ‘온에어’의 주인공 서영은(송윤아)이 눈물 글썽이던 그 역이다. 철로 주변에 늘어선 벚나무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역사가 없다. 이정표만 덩그러니 서서 이곳이 역이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안타까워 마시라. 매년 4월 초 진해 군항제 기간에 임시열차가 정차한다. 그대에게 그리움이 있다면 벚꽃열차 타고 경화역으로 오시라. 화사한 자태 뽐내는 진해 벚꽃이 그대에게 긴긴 그리움의 편지를 읽어줄 것이니.

    역시 봄에는 꽃구경 따를 것이 없다. 벚꽃 막 피기 시작한 여좌천변을 걷노라니 겨우내 웅크렸던 몸과 마음 환하게 피어난다. 여좌천 좌우로 줄지어 서서 가지 서로 얽혀 있는 저 벚나무들 한꺼번에 폭발하듯 꽃망울 터트리면 천지사방이 다 까무러치지 않고는 배겨나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벚나무마다 나비, 하트 등의 조형물을 달아놓고 반짝이 전구로 장식해놓았다. 축제 분위기 돋우려는 노력을 탓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꽃나무에 전깃불 달아놓은 것은 꽃을 모욕하는 일. 눈요기는 될지 몰라도 아름답지는 않다.

    문명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자꾸 무너뜨린다. 아름다움은 생명에서 나오는 것이고, 균형과 조화에서 비롯되는 것. 체르니셰프스키의 말을 빌리자면 아름다움은 생명의 완전한 발현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실로 어마어마한 것이다. 어마어마하다 못해 숭고한 것이다.



    봄이 왔다는 것은

    그래서 꽃이 핀다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한 일이다

    군항막걸리나 점도다리쑥국에 둘러앉은

    아이들 젖니 같은 저 꽃들

    온 세상의 하루가

    먼 별들의 손뼉소리에 맞춰 꽃멀미를 하며

    춘궁(春窮)의 마을마다 밥상을 차리기 때문이다

    봄이 왔다는 것은

    실로 위대한 밥상에 대한

    가장 숭고한 시간의 숟가락질이다-이월춘, ‘벚꽃 밥상’



    여좌천 주변에는 벚꽃의 정취를 즐기려는 관광객과 시민들이 꽃망울을 터트린 벚꽃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으며 추억을 남기고 있다. 주말여행을 왔다는 여대생 몇은 벚꽃을 보니까 마음도 환해진다며 싱그럽게 웃는다.

    시내의 벚나무들도 아래쪽 가지부터 꽃이 피기 시작했다. “먼/ 해와 달의 속삭임/ 비밀한 울음”(박두진, ‘꽃’에서)의 현장이다. 그래. 이 꽃송이 피우려고 365일 해와 달은 아득히 속삭이고 아무도 모르는 피 흘림의 시간을 보냈으리라. 가로수들은 하나둘씩 터트리기 시작한 꽃망울 잔뜩 매단 가지를 파란 하늘에 걸쳐 놓고 있다.



    사춘기 시절 등교길에서 만나 서로 얼굴 붉히던 고 계집애

    예년에 비해 일찍 벚꽃이 피었다고 전화를 했습니다 (중략)



    한때의 화끈거리던 낯붉힘도 말갛게 지워지고

    첫사랑의 두근거리던 시간도 사라지고

    그녀나 나나 같은 세상을 살고 있다 생각했는데

    우리 생에 사월 꽃잔치 몇 번이나 남았을까 헤아려보다

    자꾸만 눈물이 났습니다



    그 눈물 감추려고 괜히 바쁘다며

    꽃은 질 때가 아름다우니 그때 가겠다. 말했지만

    친구는 너 울지, 너 울지 하면서 놀리다 저도 울고 말았습니다

    -정일근, ‘사월에 걸려온 전화’에서



    진해 군항제 기간 대부분 행사는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치러진다. 활력 넘치는 볼거리, 먹을거리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주변에 사적 제291호로 지정된 진해우체국 건물이 있고, 동쪽으로 일명 탑산이라 불리는 제황산공원이 있다. 한때 서울 명동의 다방처럼 문화예술인들의 안방 역할을 했던 ‘흑백다방’ 자리도 이 근처다.

    진해만을 굽어보는 이순신 장군 동상이 있는 북원로터리를 지나 중원로터리를 거쳐 남원로터리에 간다. 誓海魚龍動 盟山艸木知라 새겨진 김구 선생의 친필 시비를 손으로 쓰다듬어 본다. 바다에 맹세하니 고기와 용이 움직이고 산에 맹세하니 초목이 안다는 내용이다.

    벌써 어스름이 내린다. 남원로터리의 별미집 ‘나무젓가락’에 들러 간단히 목을 적시며 진해의 시인 이월춘 형에게 문자를 넣는다. 안주인의 친절한 마음 씀씀이가 오래 남는다. 봄날이면 모든 거리가 벚꽃터널 이루는 도시, 진해. 골목골목 벚꽃 향기 부풀어 사람의 몸까지 향기롭게 만드는 도시, 진해. 온몸 분홍 빛깔 향기로 무장한 벚꽃 나라 병사들이 진해를 점령하고 있다. 화무십일홍이라 했으니 꽃의 아름다움은 한순간에 머무를 것이나 아름다운 봄의 점령군이 펼치는 꽃춤 마음껏 감탄하고 즐기자. 봄날은 짧을 것이지만 추억은 영원한 것.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나태주, ‘풀꽃’) 아름답다고 칭찬할수록 사람도 꽃도 아름다워진다.

    줄지어 선 벚나무 폭발하듯 꽃망울 터트려

    화려한 벚꽃과 싱그러운 미소 사진에 담고…

    그리움이 있다면 벚꽃열차 타고 오시라

    꽃필 적에만 기차가 서는 경화역으로

    글·사진= 배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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