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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속으로] 김태희 탈북난민북송반대경남시민연대 실행위원

“목숨 걸고 자유 찾아온 탈북 동포들을 살려주세요”

  • 기사입력 : 2013-03-26 01: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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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태희 탈북난민북송반대경남시민연대 실행위원이 지난 23일 마산역 앞에서 탈북난민 북송반대운동을 하고 있다.


    요즘 토요일 오후 마산역에 가면 ‘탈북난민 북송반대’를 외치는 사람들이 있다. 중국 정부에, 한국 정부에, 세계의 양심들에게 탈북자들의 강제북송 중단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은 탈북자로 구성된 탈북난민북송반대 경남시민연대 회원들이다. 이 조직을 주도하는 이가 김태희(41) 씨다. 실행위원인 그는 함경북도 회령에서 탈북했다.

    자유를 찾아 목숨을 건 네 번의 시도 끝에 한국에 왔다. 김 씨로부터 북한에서의 삶과 ‘드라마 같은’ 탈북과정, 북송 반대운동에 대해 들었다.



    아버지 살리려 소 도둑질

    김 씨의 아버지는 위에 구멍이 생긴 ‘위 천공’으로 세 번의 대수술을 받았다. 아버지 병으로 가정은 파탄에 이르렀고, 설상가상 언니와 오빠까지 정신이상자가 되었다. 어머니는 김 씨가 열 살도 되기 전에 돌아가셨다. 소녀가장이 되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아버지 병 간호로 일을 못 나가니 배급이 잘렸다. 하지만 살아야 했다. 산에 가서 산나물, 도토리 등 닥치는 대로 캐고 주워 와 연명했다. 몇 년째 앓는 아버지와 정신이 없는 형제를 살피느라 김 씨조차 기력이 다했다.

    하루는 정신 나간 오빠가 농장의 소를 몰고 왔다. 이렇게도 죽고 저렇게도 죽을 바에야 가족들에게 소고기나 먹여보자는 생각에 훔쳐온 소를 잡았다. 하지만 한밤중에 뼈를 찍는 소리에 누군가가 신고를 했다. 영락없는 소도둑이 됐다. 안전부(경찰서)에 불려갔다. 아버지를 살리려 그랬다는 사정 얘기를 하고 풀려나기는 했지만 소도둑이라는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그 일 이후 사흘을 굶은 오빠가 죽었다. 꽃제비 생활을 하던 언니도 그달에 저 세상으로 갔다. 아버지 먹을 강냉이 몇 킬로그램과 국수 한 사리를 남겨놓고 중국 국경을 건넜다. “아버지 꼭 돌아올테니 기다려 주세요. 이 말 한마디와 함께….” 그때가 1997년이다. 김 씨는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물이 흐른다.

    “아버지는 그다음 해 내 이름을 부르면서 돌아가셨답니다. 쌀밥 배불리 드리겠다고 목숨 걸고 떠났건만 그 약속을 못 지켰죠.”



    네 번의 탈북 세 번의 북송

    중국으로 건너갔을 때가 26살이었다. 의지할 곳이 마땅치 않아 중국인과 결혼을 하고 길림성 화룡현에 자리 잡았다. 결혼이라고 했지만 중국공안을 피해다녀야 했다. 불법체류자 색출이 심해져 태어난 지 20일밖에 안 된 아들을 업고 피난생활을 해야 했다. 탈북자에게는 포상금이 걸려 있어 숨을 곳도 마땅찮았다.

    2002년 6월 김 씨는 아이가 보는 앞에서 공안에 체포돼 7월 초 북송됐다. 북한 안전원들에게 ‘반역자’ 소리를 들으며, 함경북도 청진시 탈북자 집결소로 보내졌다.

    “단지 배가 고파서, 살기 위해서 탈출한 것인데 반역자 딱지를 붙였습니다. 그곳에서 3개월 동안 온갖 수모와 고통을 받았습니다.”

    김 씨는 집결소에 양식을 대주는 성북부업지라는 곳에서 노역을 했다. 그해 10월 중순께 지역안전부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해는 다행히 “도강자(북한이 탈북자를 이르는 말)를 관대히 용서해줘라”는 상부의 지침이 있었다. 재판 결과를 기다리며 사상개조기관인 ‘단련대’를 가기 직전에 다시 국경을 넘었다. 2002년 10월 하순께다. 아이를 찾아갔다. 하지만 불과 5개월 만인 2003년 2월 초 다시 중국공안에 검거됐다. 청진시 탈북자 집결소를 거쳐 회령에서 재판을 기다리던 중 100리 길을 야반도주해 다시 탈북했다. 세 번째 탈북이다.

    탈북이 어렵지 않느냐는 질문에, 김 씨는 “돈만 있으면 의외로 수월하다”고 말했다. 믿을 만한 브로커를 통해 군간부를 매수하면 도강하기 쉬운 곳으로 길을 열어주고 브로커가 중국의 안전한 곳까지 동행했다. 김 씨는 중국의 안전한 곳에 도착하면 나머지 돈을 주는 방식으로 계약을 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중에 돈만 떼이고 인신매매를 당하기도 한다고 했다.

    2004년 10월 중국 연길에서 다시 잡혔다. 북송돼 가자 안전원들이 “머저리 같은 게 왜 붙들려 왔느냐. 도강했으면 멀리 숨어 잡히지 말지”라며 인간적으로 대해줬다. 상습도강으로 2년형을 받았다. 이대로 잡혀갈 수 없다는 생각에 호송원에게 수작(꾐)을 걸었다. 돈도 주고 술도 사줘 포승을 풀게 한 뒤 허술한 틈을 타 그 길로 도망쳤다. 2004년 12월 26일 네 번째 국경을 넘었다.

    연길에서 가정부로 일하면서 한국음식요리학원에서 요리를 익혔다. 우연히 조선족 방송의 구직 프로그램을 보고는 한국인 회사의 식당에 취업했다. 물론 가짜 신분증을 냈다. 한국인 경리로부터 컴퓨터를 배웠고, 포털에서 ‘탈북자동지회’ 사이트를 만났다. 탈북자동지회에는 탈북자들의 여러 수기가 올라와 있었다.

    “세 번의 북송 끝에 얻은 결론은 자유를 찾는 것이었습니다. 숨어 살지 않고 인간처럼 살고 싶었습니다. 탈북자동지회의 글을 보면서 자신감을 가졌습니다.”

    자신도 글을 올리고 도와달라고 했다. 2006년 12월, 구원의 손길이 김 씨에게 닿았다. 탈북자동지회를 통해 남한 사람인 현재의 남편을 만났다. 남편의 도움으로 두리하나선교회와 연결됐고, 다음 해 3월 태국을 통해 한국으로 입국했다.

    그리고 2009년 6월 친구한테 맡겨두었던 아들을 한국으로 데려왔다.



    그들과 자유를 같이하고 싶다

    “대한민국에 애국하는 길은 남한 사회에 잘 정착하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김 씨는 산전수전 다 겪어서 그런지, 겁이 없고 매사 적극적이다. 탈북북송반대운동에 앞장서게 된 것도 그의 성격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이 운동을 하게 된 계기는 지난해 초, 당시 박선영 국회의원의 탈북자 북송반대 단식 소식을 접하면서다. 자신이 뭔가 해야겠다는 생각에 부산중국영사관 앞에서 1인시위에 나섰다. 1년에 3000명이 북송되는 현실, 탈북자가 세상에 알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신념에서다.

    김 씨가 1인시위를 시작하자 다른 탈북자들도 힘을 보탰다. 성명서를 채택해 영사관에 전달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면서 기독교 단체와 힘을 합쳐 부산에서 탈북북송반대운동을 펼쳤다. 이어 주소지인 경남에서 경남시민연대 결성에 나섰다. 그리고 시민들에게 탈북자들의 현실을 알리고, 그들에게 난민의 지위를 인정하라고 세계에 호소했다. 지난해 5월부터 창원공설운동장과 창원시외버스터미널에서 주 1회 시민들과 만났다. 지금은 마산역 광장에서 집회를 이어가고 있다. 2명으로 시작한 집회는 지금 6명으로 늘었다.

    “통일되는 날까지 꾸준히 할 생각입니다. 자유와 평화를 위해 창원시민, 대한민국 국민께 외칩니다. 탈북형제를 살려주십시오. 중국 정부는 탈북자를 난민으로 인정하고 강제북송을 중지하십시오. 북한 정부는 탈북자들의 인권 유린을 중지하십시오.”


    글= 이학수 기자 leehs@knnews.co.kr

    사진= 김승권 기자 skkim@k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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